죽음은 희망이 없는 이들에게는 비극의 순간입니다. 영원한 이별이고 상실의 순간이지요.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며 영원이 시작되는 순간이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색채를 띤 사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그분의 가족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죽음에 대한 위협을 극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의 참된 친구가 되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언제나 세상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고 곧잘 우리는 옆길로 새곤 하지요. 그분의 말씀을 즐거이 듣지만 뿌리가 내리지 못하기도 하고, 아예 관심이 없기도 하는 등 갖가지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도대체 합당한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왜 이렇게 우리는 시달려야 하는 것일까요?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좀 더 쉽고 편한 방법은 없는 걸까요? 그냥 어디 서류 등록하듯이 등록만 하고 나면 일단 구원이 확정되고 나머지는 내 맘대로 어떻게 해 볼 수는 없는 것일까요?
안타깝지만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어떤 ‘상품’이 아니라 ‘상태’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상품으로 선물받는 것이 아니라, 상태로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으면 그것을 즐깁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기쁨이 잦아들고 사라지고 말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거짓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참된 기쁨은 내 안에서부터 은근히 시작되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음식을 즐기면 음식을 먹을 때에만 행복하겠지만, 숨쉬기를 즐기면 숨쉬는 모든 순간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품 안에 있다는 것을 명백히 인식함으로써 일상의 모든 사건을 ‘감사’로 뒤바꾸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역경과 시련마저도 그 안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감사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쉽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 상태에 이르려면 익숙해져야 하고 변화를 겪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그 일을 맡기는 것이지요.
사실 과거에는 이 모든 과정을 극도의 의지의 헌신을 통해서 스스로 이루어야 했습니다. 수많은 단계의 율법이 있었고 그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 완전한 거룩함에 이르러야 했지요. 그래서 운 좋으면 그런 이가 수천억명 중에서 한 명이 나올까 말까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이루시고 그저 당신의 뒤를 따라오면 그것을 이루도록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까요. 전에는 계단을 타고 63빌딩을 올라갈 것을 이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셈이 된 것입니다.
그 비법은 ‘사랑’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이 곁에서 도와 함께 그 길을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면 일은 전보다 훨씬 수월해지는 셈이었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 자신들 안에 담긴 스스로의 생각들이 너무나도 강력했고 다른 것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다른 말로 ‘이기주의’라고 하는 이 생각들은 다른 존재가 내 안에 들어와 활동하는 것을 도저히 허락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모순 상황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쉽고 빠른 구원의 길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마다하고 다시 예전의 그 힘든 길을 찾으려고 기를 쓰고 다니는 것이지요.
남은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몫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이해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나아가 그분의 가르침을 다시 세상에 ‘현재화’ 시킵니다. 그들은 또다른 예수님이 되어 세상 사람들을 다시 하느님에게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덕스러운 삶과 선행을 통해서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지요. 그리고 세상 모든 이가 하느님의 구원을 알게 될 때까지 그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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