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선의’로 가득한 세상이 존재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 만물을 사랑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세상이 있다면 정말 아름다운 곳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굶주림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마다 능력껏 만들어 낸 것을 이기적인 목적으로 쓰는 게 아니라 가장 필요한 사람이 쓰도록 도울 것이기 때문이지요. 거기서는 갈라져 싸우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증오와 다툼과 시기라는 것은 그들이 가장 혐오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상대를 위해서 배려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곳에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고 오직 유일한 법이 그곳을 지배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법이겠지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세상. 거기에서는 아무도 서로를 위협으로 느끼지 않고 언제라도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서 자신이 가진 좋은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려고 할 것입니다.
상상을 하자면 끝이 없겠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그런 ‘유토피아’가 펼쳐질 가능성은 굉장히 희박하기도 합니다. 사실 그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새하늘과 새땅을 만들어 두시고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거기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우리는 일종의 ‘훈련’을 받는 시간을 거치는 것이지요. 온전한 자유를 지니고 있으면서 ‘사랑’을 훈련하는 훌륭한 학교를 선물받은 셈입니다. 헌데 과연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일까요?
불행하여라, 반항하는 도성, 더럽혀진 도성, 억압을 일삼는 도성! 말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않는구나. (스바 3,1-2)
사람들은 보기 전에는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하고, 하느님은 보여줄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두 눈으로 보게 되면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 그곳을 공격하고 탈취할 준비를 하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하느님은 그곳을 보여주지 않고 오직 ‘믿는 이들’에게만 그 소식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 곳은 두 눈으로 볼 수도 없는 곳입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지요. 행복을 바라볼 수 있습니까? 사랑이 보이나요?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받았다고 믿는 것이고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믿음’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지요. 값비싼 차를 사면 행복하다고 ‘믿는’ 것이고, 아름다운 이성을 만나야 행복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헌데 사람들은 그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서로 길이 엇나간 셈입니다. 볼 수 없는 것은 볼 수 없을 뿐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것들이 존재하지만 모두가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이미 바라보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바라봄은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차원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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