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 길을 모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길이라는 것은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가는 여정입니다. 그래서 길을 안다는 것은 어디를 향해서 가는지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적지를 뚜렷이 안다면 설령 길을 잘 몰라도 길을 만들어서 갈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누군가는 미사에 가라 하고 누군가는 기도를 하라 하고 누군가는 성경을 써보라 합니다. 모두 그럴싸 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어떨까요? 누군가는 가정을 내팽개치고 성당 활동에서 인간적 만족을 느끼려고 미사에 갑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일상의 일을 회피하기 위해서 기도라는 핑계 안으로 빠져듭니다. 또 누군가는 성경을 써서 다른 이들에게 으스대며 자신의 과업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들은 그 자체로 무턱대고 좋은 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여정이 어긋나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길이라는 말은 고정된 하나의 삶의 방식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길이라는 말의 의미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묻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것이 지혜의 길이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됩니다.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은 예수님은 당신의 발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문질러대는 죄녀를 바라보며 그녀를 내치지 않고 오히려 베드로에게 그녀가 하는 일의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간통하다 들켜 붙들려온 여인을 앞에 두고 예수님은 용서의 메세지를 선포합니다. 나병 환자에게는 손을 갖다 대시고 눈 먼 이에게는 시력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길입니다.
길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마음이 산란해지게 됩니다. 마음이 산란하다는 것이 곧 길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정해둔 목적지에 다가서고 있으면 우리는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가설수록 안정된 내면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라고 하셨고 모든 이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낙타는 삼키면서 벌레는 뱉어내기 일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목도 찾아내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을 목적지로 삼아 자신을 하느님께 내어 맡기는 사람은 언제나 그분의 보살핌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만나게 되고 우리는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댓글
저는 마산교구 구암동 성당 홍보분과를 맡고 있는 정윤규 파스칼 이라고 합니다.
신부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우리는 그 길을 아는가? 이 내용의 일부를 발췌해서 주보에 싣고 싶습니다. 다만 저희 신부님 사목 방침상 타 교구 신부님 글 이라고 적지는 못하고, 옮겨온 글 이라고 밝히겠습니다. 신부님 허락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