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이사 65,17)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훗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면서 성경 안에서 묘사된 것들이 모두가 진실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과 진실은 같은 말 같지만 다릅니다. 사실은 우리가 지금 두 눈으로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하고, 진실은 진리의 충만함을 표현합니다. 한 사람을 두고 ‘그는 붉은 티셔츠를 입고 있어.’라고 말하면 그건 사실이고, ‘그는 약속을 하면 지키는 사람이야.’라고 하면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진실이 많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사야 서에서 표현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쁨, 즐거움, 자신들의 고유한 공간(집), 수고와 열매’ 입니다.
기쁨과 즐거움
우리가 기뻐하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맛있는 과자를 먹을 때 기쁜 이유는 그 과자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 과자의 입안에서의 맛은 ‘쾌락’일 뿐입니다. 그것은 금방 사라지는 것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과자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과자가 정말 맛이 있지만 내가 누군가와 싸우고 난 뒤라면 나는 그 과자 봉지가 내 곁에 있어도 씩씩거리면서 쳐다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쾌락이 아무리 강해도 내 마음의 기쁨은 그 쾌락 자체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것에 더 좌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나라는 이런 기쁨이 가득한 곳이 됩니다. 그래서 그 안에는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사랑이 가득한 곳, 서로가 서로의 아쉬움을 보살피고 돌보는 곳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세상처럼 누가 누구를 욕하고 험담하고 공격하는 일이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그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훈련받은 이들’이라서 기본적으로 상대를 해친다는 개념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고유한 공간(집)
하늘나라가 모두를 한데 집어넣은 도떼기 시장과 같은 곳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늘나라는 모든 것이 제 질서를 유지하는 곳입니다. 각자는 저마다의 영역을 지닐 수 있고(물론 지금 우리가 사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그 영역을 존중받습니다. 우리의 내적 수준은 모두 서로 다릅니다. 누군가는 하느님을 아는 수준에서 그칠 수 있고, 누군가는 하느님을 간절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지닌 내면의 수준에 따라서 고유한 영역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역을 서로 존중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영역 안에서 자신이 지닌 것으로 ‘집’을 건설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 집의 재료는 벽돌과 시멘트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의 세상에서 건져올린 여러가지 덕목들이 될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부터는 저도 구체적으로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수고와 열매
하늘 나라에서 모두가 ‘나태하게’ 쉰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자발적’인 것이 됩니다. 그 누구도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두를 사랑 때문에 해 나갈테지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은 자신이 지닌 달란트에 따라서 열심히 해 나가고 그 노력의 결과를 서로 나누고 즐기는 곳이 하늘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진실들이 이루어질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고 감탄할 수 있는 것은 더는 우리에게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이사 65,17) 그때에는 오직 예수님이 소중히 여긴 가치들, 즉 천상적 진리와 아름다운 덕들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훗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면서 성경 안에서 묘사된 것들이 모두가 진실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과 진실은 같은 말 같지만 다릅니다. 사실은 우리가 지금 두 눈으로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하고, 진실은 진리의 충만함을 표현합니다. 한 사람을 두고 ‘그는 붉은 티셔츠를 입고 있어.’라고 말하면 그건 사실이고, ‘그는 약속을 하면 지키는 사람이야.’라고 하면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진실이 많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사야 서에서 표현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쁨, 즐거움, 자신들의 고유한 공간(집), 수고와 열매’ 입니다.
기쁨과 즐거움
우리가 기뻐하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맛있는 과자를 먹을 때 기쁜 이유는 그 과자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 과자의 입안에서의 맛은 ‘쾌락’일 뿐입니다. 그것은 금방 사라지는 것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과자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과자가 정말 맛이 있지만 내가 누군가와 싸우고 난 뒤라면 나는 그 과자 봉지가 내 곁에 있어도 씩씩거리면서 쳐다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쾌락이 아무리 강해도 내 마음의 기쁨은 그 쾌락 자체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것에 더 좌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나라는 이런 기쁨이 가득한 곳이 됩니다. 그래서 그 안에는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사랑이 가득한 곳, 서로가 서로의 아쉬움을 보살피고 돌보는 곳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세상처럼 누가 누구를 욕하고 험담하고 공격하는 일이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그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훈련받은 이들’이라서 기본적으로 상대를 해친다는 개념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고유한 공간(집)
하늘나라가 모두를 한데 집어넣은 도떼기 시장과 같은 곳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늘나라는 모든 것이 제 질서를 유지하는 곳입니다. 각자는 저마다의 영역을 지닐 수 있고(물론 지금 우리가 사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그 영역을 존중받습니다. 우리의 내적 수준은 모두 서로 다릅니다. 누군가는 하느님을 아는 수준에서 그칠 수 있고, 누군가는 하느님을 간절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지닌 내면의 수준에 따라서 고유한 영역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역을 서로 존중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영역 안에서 자신이 지닌 것으로 ‘집’을 건설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 집의 재료는 벽돌과 시멘트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의 세상에서 건져올린 여러가지 덕목들이 될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부터는 저도 구체적으로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수고와 열매
하늘 나라에서 모두가 ‘나태하게’ 쉰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자발적’인 것이 됩니다. 그 누구도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두를 사랑 때문에 해 나갈테지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은 자신이 지닌 달란트에 따라서 열심히 해 나가고 그 노력의 결과를 서로 나누고 즐기는 곳이 하늘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진실들이 이루어질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고 감탄할 수 있는 것은 더는 우리에게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이사 65,17) 그때에는 오직 예수님이 소중히 여긴 가치들, 즉 천상적 진리와 아름다운 덕들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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