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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들의 상호 연계성

우리는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이들과 상호작용을 주고 받습니다. 미친듯이 욕을 해대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가 정상일 리가 없고, 정반대로 이웃에게 따스한 미소를 건네고 남을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서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가 그런 일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나 무죄한 아이는 마치 말랑말랑하게 녹아 있는 초와 같아서 어른이 누르는 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국이 남게 되지요. 아름다운 문양을 새겨 넣으면 그렇게 남게 되고, 추악한 것을 새겨 넣으면 그대로 남게 됩니다.

물론 회복도 가능합니다. 미움으로 다친 마음은 사랑으로 회복이 됩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지요. 아름다운 문양을 새겨 넣었는데 아주 더러운 경험으로 전체 그림을 망쳐 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내가 하는 말 한마디, 내가 보여주는 실천 하나가 이미 다른 이들에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무심코 던지는 부정적인 말과 행동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반대로 내가 하는 선한 말, 아름다운 말과 행동은 상대를 치유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이 나쁜 것을 던지면서도 그에게 주먹질을 하지 않았으니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돌심장을 지닌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관계, 하느님께서 날더러 그의 도움이 되라고 소명을 주신 관계가 아닌 이상은 가능하면 거리를 두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편, 자녀, 부모와 같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왜 그런 이를 주변에 두셨고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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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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