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마태 21,46)
하느님을 모르는 교만한 이들의 아이러니는 바로 사람을 두려워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정반대로 자신들을 심판할 진정한 권한이 있는 하느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지요.
그들이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 결과가 즉시 눈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평판은 자신의 생계에 직결되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이 알아줘야 자신들이 생을, 현세의 삶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하느님의 평가는 지금 당장 눈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그들에게는 악을 더욱 저지를 기회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악이라는 것이 그들이 살인이나 방화를 저지른 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은 하느님에게서 더욱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영원’을 잃고 맙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떤 이들은 ‘하느님을 가르치기’까지 합니다. 정작 자신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면서도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아이러니’ 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군중을 두려워하는 이들, 사람의 평판에 목숨을 거는 이들, 그러면서 그분, 하느님의 외아들을 붙잡으려는 그들은 결국 그분에게는 아무런 해도 입히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이들도 마찬가지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교만한 이들의 아이러니는 바로 사람을 두려워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정반대로 자신들을 심판할 진정한 권한이 있는 하느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지요.
그들이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 결과가 즉시 눈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평판은 자신의 생계에 직결되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이 알아줘야 자신들이 생을, 현세의 삶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하느님의 평가는 지금 당장 눈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그들에게는 악을 더욱 저지를 기회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악이라는 것이 그들이 살인이나 방화를 저지른 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은 하느님에게서 더욱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영원’을 잃고 맙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떤 이들은 ‘하느님을 가르치기’까지 합니다. 정작 자신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면서도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아이러니’ 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군중을 두려워하는 이들, 사람의 평판에 목숨을 거는 이들, 그러면서 그분, 하느님의 외아들을 붙잡으려는 그들은 결국 그분에게는 아무런 해도 입히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이들도 마찬가지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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