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요한 11,47)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이 우리의 의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 질문을 다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엇이 옳은지는 알겠는데 그것을 이루기를 거부하는 나 자신과 어떻게 타협하면 좋겠소?’
예수님은 표징을 일으키고 다녔고 사람들은 그분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우리의 내면으로 비유한다면 ‘진리’를 만난 우리의 정신이 그분을 따르고 싶어하는데 이미 세상에 길들여진 우리의 본성이 그것을 가로막는 것과도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합니다. 복잡해 보이는 반응들이 있지만 사실은 2 가지 반응 뿐입니다. 진리에 따르거나, 거부하거나.
진리에 따르는 이들은 옳다고 알려진 바를 위해서 자신을 바꾸어 가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방향수정을 하는 이들이지요.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고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것들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믿음을 두고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하지요.
거부하는 이들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진리를 거부하는 이들이지요. 바로 복음에 등장하는 이들처럼 예수님의 진실함 앞에서 그분을 해치려고 시도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눈 앞의 것들에 목을 매고 살아가며 영원의 희망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을 합니다. 이 표현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만큼 거룩한 생활에 대해서 관심이 있거나 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내버려둡니다. 아니,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운전대가 내 손에 있는데 내가 원래 가야 할 방향에서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돌리고 있지요.
잊지 마십시오. 지금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이 우리의 의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 질문을 다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엇이 옳은지는 알겠는데 그것을 이루기를 거부하는 나 자신과 어떻게 타협하면 좋겠소?’
예수님은 표징을 일으키고 다녔고 사람들은 그분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우리의 내면으로 비유한다면 ‘진리’를 만난 우리의 정신이 그분을 따르고 싶어하는데 이미 세상에 길들여진 우리의 본성이 그것을 가로막는 것과도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합니다. 복잡해 보이는 반응들이 있지만 사실은 2 가지 반응 뿐입니다. 진리에 따르거나, 거부하거나.
진리에 따르는 이들은 옳다고 알려진 바를 위해서 자신을 바꾸어 가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방향수정을 하는 이들이지요.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고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것들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믿음을 두고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하지요.
거부하는 이들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진리를 거부하는 이들이지요. 바로 복음에 등장하는 이들처럼 예수님의 진실함 앞에서 그분을 해치려고 시도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눈 앞의 것들에 목을 매고 살아가며 영원의 희망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을 합니다. 이 표현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만큼 거룩한 생활에 대해서 관심이 있거나 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내버려둡니다. 아니,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운전대가 내 손에 있는데 내가 원래 가야 할 방향에서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돌리고 있지요.
잊지 마십시오. 지금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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