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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

사람이 엇나가는 이유는 그의 구미에 맞는 먹잇감이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눈 앞의 유혹거리가 내면에 존재해 있었다는 이야기이지요. 이는 마치 누군가를 미워하는 중에 두 사람이 다가와서 한 사람은 그에 대한 칭찬을 하고 다른 사람은 그에 대한 비판을 하면 아무래도 우리의 마음이 칭찬 보다는 비판으로 더 끌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엇나갈 방향을 이미 우리의 내면 안에 마련해 두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유혹자는 나쁩니다. 유혹자는 자신의 책임에서 절대로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유혹에 빠져드는 당사자에게도 책임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유혹이라는 것은 강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강제로 무언가를 하게 했다면 그것은 그것을 당한 본인의 죄가 아닙니다. 폭행이 그런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힘 센 사람이 약한 이를 폭행을 했다면 그것은 그것을 행한 힘센 이가 죄를 덮어써야 할 일이지 그것을 당한 사람은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밖의 유혹들은 상황이 다릅니다. 유혹하는 사람과 유혹되는 자가 죄를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혹 당하는 이의 내면에 이미 그 유혹에 대한 ‘선호’가 존재하기에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똥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이는 없습니다. 누구나 똥에 대해서는 자동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좋은 것, 보석이나 돈과 같은 것들은 누군가에게는 유혹의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즉, 돈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유혹의 요소가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돈보다는 다른 것들을 더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그닥 유혹의 요소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들어있는 선호도를 파악할 수 있다면 미리 대비할 수도 있습니다. 즉, 평소에 돈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사람은 재물의 본질적 의미에 대해서 배우고 그것의 허망함을 깨달으면 내면에 깃들어 있는 ‘선호도’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되고, 나아가서 다른 것에 대한 선호도를 내면에 형성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유혹에 덜 빠져들고 선한 일을 더 많이 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우리 안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선호하고 무엇에 달려들고 있는 걸까요? 그건 우리가 일상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는 사항을 살펴보면 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누군가의 행복인지, 아니면 무언가를 향한 분노인지 조금만 시간을 내어서 스스로를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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