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루카 18,13)
바닥을 쳐 본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의 깊이를 체험합니다. 하느님에게서 가장 멀리 도망가본 사람은 하느님의 선의 범위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돌아와야 알 수 있지요. 그대로 멸망해 버리고 나면 알 도리가 없는 법입니다.
‘돌아섬’, 즉 ‘회개’는 죄인들이 하는 것입니다. 의인들이 회개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잊고, 하느님을 모욕한 죄인들이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회개한 죄인들은 자신들이 엇나갔던 만큼 돌아서서 역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 중에 죄인 아닌 사람이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헌데 우리 중에는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지요. 자신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이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공통적인 증상은 바로 타인을 향한 ‘심판’입니다.
의로워야 심판을 합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랄 수 없습니다. 심판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먼저 떳떳해야 합니다. 자신도 거짓말을 하면서 아이가 거짓말을 한다고 때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자신도 못된 짓을 하면서 아이가 못된 짓을 한다고 꾸중하는 것만큼 위선적인 행동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오직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지요.
헌데 우리 중에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남을 심판하면서 남을 업신여기지요. 물론 겉으로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지만 속으로 은근히 ‘우월감’을 느낍니다.
‘나는 저 사람처럼 저렇지 않아.’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스스로를 의인으로 자각하는 이들의 도덕적 우월감이 그들을 장님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기 자신의 오류를 전혀 바라보지 못하게 하지요. 그렇게 닫힌 눈으로 더욱 극심하게 타인들을 재단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스스로의 ‘의로움의 근거’를 만들어 버립니다. 묵주기도를 100단 하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나 기도를 하면서도 구역 모임에 가서 누군가를 험담하는 것은 죄스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묵주기도를 100단씩 바치는 열심한 사람이니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그래서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은 험담이 아니라 정당한 비판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많이 해 왔습니다. 회개는 커녕 하느님 앞에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자신의 정당성을 외쳐 왔습니다. 거르지 않는 판공, 빠지지 않는 주일미사가 우리의 근거가 될 때에 우리는 너무나도 초라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러한 의무조항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입니다. 세리가 한 것과 같은 참된 회개입니다.
바닥을 쳐 본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의 깊이를 체험합니다. 하느님에게서 가장 멀리 도망가본 사람은 하느님의 선의 범위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돌아와야 알 수 있지요. 그대로 멸망해 버리고 나면 알 도리가 없는 법입니다.
‘돌아섬’, 즉 ‘회개’는 죄인들이 하는 것입니다. 의인들이 회개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잊고, 하느님을 모욕한 죄인들이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회개한 죄인들은 자신들이 엇나갔던 만큼 돌아서서 역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 중에 죄인 아닌 사람이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헌데 우리 중에는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지요. 자신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이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공통적인 증상은 바로 타인을 향한 ‘심판’입니다.
의로워야 심판을 합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랄 수 없습니다. 심판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먼저 떳떳해야 합니다. 자신도 거짓말을 하면서 아이가 거짓말을 한다고 때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자신도 못된 짓을 하면서 아이가 못된 짓을 한다고 꾸중하는 것만큼 위선적인 행동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오직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지요.
헌데 우리 중에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남을 심판하면서 남을 업신여기지요. 물론 겉으로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지만 속으로 은근히 ‘우월감’을 느낍니다.
‘나는 저 사람처럼 저렇지 않아.’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스스로를 의인으로 자각하는 이들의 도덕적 우월감이 그들을 장님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기 자신의 오류를 전혀 바라보지 못하게 하지요. 그렇게 닫힌 눈으로 더욱 극심하게 타인들을 재단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스스로의 ‘의로움의 근거’를 만들어 버립니다. 묵주기도를 100단 하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나 기도를 하면서도 구역 모임에 가서 누군가를 험담하는 것은 죄스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묵주기도를 100단씩 바치는 열심한 사람이니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그래서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은 험담이 아니라 정당한 비판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많이 해 왔습니다. 회개는 커녕 하느님 앞에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자신의 정당성을 외쳐 왔습니다. 거르지 않는 판공, 빠지지 않는 주일미사가 우리의 근거가 될 때에 우리는 너무나도 초라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러한 의무조항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입니다. 세리가 한 것과 같은 참된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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