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은 그 수준의 사람에게 먹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에게 진짜와 모조품을 두고서 구분해 보라고 하면 그들은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분없이 사서 쓰다가 나중에 시간이 흘러서야 짝퉁의 허술함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이 분별이 참된 가르침이라는 주제로 우리 앞에 다가올 때에 우리는 무엇이 진정 참된 가르침인지 알지 못하기에 이것 저것 다 주워담아 쓰다가 결국 그릇된 가르침 앞에서 후회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압니다. 그들은 섬세한 분별로 진짜배기와 가짜배기를 구분해 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전문가들의 섬세하면서도 ‘권위있는 해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1. 양심입니다.
인간의 양심은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양심의 소리만이라도 잘 따라갈 수 있다면 크게 엇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남을 해치면 자신의 양심이 아픈 것이 보통이지요. 어느 한 부류를 살리기 위해 반대 부류를 깨부수고 죽이라는 것은 우리의 양심에 비추어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양심이 ‘무디어진다’는 데에 있습니다. 작은 곤충 하나가 다친 것만 보아도 함께 아파하던 양심이 마치 칼이 무디어지듯이 무뎌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양심만 따르기에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2. 공적으로 공인된 가르침입니다.
성경과 성전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경이라는 것은 성령의 감도로 쓰여져 책으로 엮여진 인간에게 전해진 하느님의 가르침을 말하고, 성전(거룩한 전승, 전통)이라는 것은 성경으로 쓰여지기 전에 이미 교회가 거룩하게 생활해 오던 것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성전의 눈으로 드러나는 요약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지요. 성경에는 ‘사랑하라’라고 적혀 있지만 성전으로는 이미 그 애덕을 실천해 오고 있었지요.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으니 ‘해석’입니다. 아주 제멋대로 해석하기 시작하면 전혀 엉뚱한 가르침도 얼마든지 도출되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피를 먹지 말라던가 특정 날을 안식일로 반드시 지키라는 것 등등이 있지요.
3. 교도권
그래서 필요한 것이 권위있는 해석을 내려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교도권’이라고 합니다. 교도권은 아무 신부가 제맘대로 해대는 말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공적으로 내리는 가르침과 해석을 의미합니다. 즉, 어느 한 신부님이나 평신도 신학자가 이게 맞다고 한다고 그게 제멋대로 교도권의 가르침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 세 가지를 올바르게 활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분별’을 적용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전혀 엉뚱한 가르침에 따라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최근 들어서 이런 움직임이 적지 않습니다. 순진한 사람들을 현혹시켜서 자신이 가르치는 바를 따라가게 만들려는 움직임이지요.
가짜 진리를 따라가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은 단 한번도 ‘선과 진리와 의로움’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이 분별이 참된 가르침이라는 주제로 우리 앞에 다가올 때에 우리는 무엇이 진정 참된 가르침인지 알지 못하기에 이것 저것 다 주워담아 쓰다가 결국 그릇된 가르침 앞에서 후회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압니다. 그들은 섬세한 분별로 진짜배기와 가짜배기를 구분해 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전문가들의 섬세하면서도 ‘권위있는 해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1. 양심입니다.
인간의 양심은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양심의 소리만이라도 잘 따라갈 수 있다면 크게 엇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남을 해치면 자신의 양심이 아픈 것이 보통이지요. 어느 한 부류를 살리기 위해 반대 부류를 깨부수고 죽이라는 것은 우리의 양심에 비추어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양심이 ‘무디어진다’는 데에 있습니다. 작은 곤충 하나가 다친 것만 보아도 함께 아파하던 양심이 마치 칼이 무디어지듯이 무뎌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양심만 따르기에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2. 공적으로 공인된 가르침입니다.
성경과 성전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경이라는 것은 성령의 감도로 쓰여져 책으로 엮여진 인간에게 전해진 하느님의 가르침을 말하고, 성전(거룩한 전승, 전통)이라는 것은 성경으로 쓰여지기 전에 이미 교회가 거룩하게 생활해 오던 것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성전의 눈으로 드러나는 요약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지요. 성경에는 ‘사랑하라’라고 적혀 있지만 성전으로는 이미 그 애덕을 실천해 오고 있었지요.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으니 ‘해석’입니다. 아주 제멋대로 해석하기 시작하면 전혀 엉뚱한 가르침도 얼마든지 도출되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피를 먹지 말라던가 특정 날을 안식일로 반드시 지키라는 것 등등이 있지요.
3. 교도권
그래서 필요한 것이 권위있는 해석을 내려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교도권’이라고 합니다. 교도권은 아무 신부가 제맘대로 해대는 말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공적으로 내리는 가르침과 해석을 의미합니다. 즉, 어느 한 신부님이나 평신도 신학자가 이게 맞다고 한다고 그게 제멋대로 교도권의 가르침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 세 가지를 올바르게 활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분별’을 적용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전혀 엉뚱한 가르침에 따라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최근 들어서 이런 움직임이 적지 않습니다. 순진한 사람들을 현혹시켜서 자신이 가르치는 바를 따라가게 만들려는 움직임이지요.
가짜 진리를 따라가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은 단 한번도 ‘선과 진리와 의로움’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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