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의 죽음의 날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변화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알면서도 다시 잊어버리고 말까요?
죽음 이후의 삶의 모습은 이미 성경에 여러차례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는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냥 오래된 책이고 다 지어낸 헛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종의 교만이지요. 자신이 정말 영리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무시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다른 권위는 인정을 합니다. 어느 누가 ‘무슨무슨 박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면 그의 권위를 인정합니다. 그가 먹지 말라는 것을 먹지 않고 먹으라는 것을 먹지요. 그렇게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 받으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장님’이라는 표현 외에는 달리 말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당신의 빛이 너무나 밝은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어둠이 되어 버리는 셈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사람들의 수준에 어울리는 빛을 전해 주십니다. 바로 ‘예언자들’이지요. 예언자들은 사람들과 동시대를 살아간 인물로서 하느님의 빛을 전해 받고 사람들에게 그 빛을 전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럼 그들의 말이라도 들어야 하건만 사람들은 그럴 여유조차도 없습니다. 여유가 없어서 없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여유를 모두 지워 버리는 셈이지요.
그렇게 사람들은 엉뚱한 곳에다 마음과 노력과 시간을 쏟아 버리고 맙니다.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것들을 추구하고 추구하다가 결국 생을 마감해 버리고 말지요. 하느님이 정말 당신의 고위직을 반길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천만에요. 하느님은 당신이 ‘지니고 있는 것’은 아무 상관 않으십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는가를 살피시는 분이시지요.
여기서 또다른 어리석음이 개입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 같아서 한다는 일이 전부 ‘형식’에 그쳐 버리는 것입니다. 미사를 가면 하느님이 좋아할 것 같아서 미사를 가는데 ‘울며 겨자먹기’로 갑니다. 가난한 이를 도우면 하느님이 좋아할 것 같아서 쓰고 남는 돈 가운데에서 기부를 시작합니다. 이건 무슨 하느님이 먹고 남은 것 받고 떨어지는 거렁뱅이 취급을 하면서 그들은 하느님을 정말 사랑한다고 착각을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에는 그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나는 온전히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농담처럼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별도 달도 다 따준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XX상조’ 직원이거나 ‘OO보험’ 영업사원일 뿐입니다. 혹시나 내가 탈이 날 때 마지막으로 기댈 곳 정도로만 삼고 나머지는 나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소비하고 소비하고 또 소비합니다.
위선자들!!!!
어둠의 세력이 내던지는 이적의 유혹에는 빠져들면서 하느님의 예언자들의 경고를 무시하는 이들입니다. 철저히 이기적이면서도 교묘하게 자신의 이기성을 감추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회칠한 무덤과 같은 이들입니다. 그들의 자선은 오염되어 있고 그들의 선행은 기만일 뿐입니다.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저마다 물으면서 요행을 바라는 이들이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은전 몇 푼에 팔아넘길 자들입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하느님은 그런 이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그치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또 하루를 ‘평온하게’ 살아갑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좀 더 눈에 좋은 것, 입에 맛나는 것, 귀에 듣기 좋은 것을 찾아서 다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날 그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릴 것을 모른 채로 말이지요.
죽음 이후의 삶의 모습은 이미 성경에 여러차례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는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냥 오래된 책이고 다 지어낸 헛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종의 교만이지요. 자신이 정말 영리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무시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다른 권위는 인정을 합니다. 어느 누가 ‘무슨무슨 박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면 그의 권위를 인정합니다. 그가 먹지 말라는 것을 먹지 않고 먹으라는 것을 먹지요. 그렇게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 받으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장님’이라는 표현 외에는 달리 말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당신의 빛이 너무나 밝은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어둠이 되어 버리는 셈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사람들의 수준에 어울리는 빛을 전해 주십니다. 바로 ‘예언자들’이지요. 예언자들은 사람들과 동시대를 살아간 인물로서 하느님의 빛을 전해 받고 사람들에게 그 빛을 전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럼 그들의 말이라도 들어야 하건만 사람들은 그럴 여유조차도 없습니다. 여유가 없어서 없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여유를 모두 지워 버리는 셈이지요.
그렇게 사람들은 엉뚱한 곳에다 마음과 노력과 시간을 쏟아 버리고 맙니다.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것들을 추구하고 추구하다가 결국 생을 마감해 버리고 말지요. 하느님이 정말 당신의 고위직을 반길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천만에요. 하느님은 당신이 ‘지니고 있는 것’은 아무 상관 않으십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는가를 살피시는 분이시지요.
여기서 또다른 어리석음이 개입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 같아서 한다는 일이 전부 ‘형식’에 그쳐 버리는 것입니다. 미사를 가면 하느님이 좋아할 것 같아서 미사를 가는데 ‘울며 겨자먹기’로 갑니다. 가난한 이를 도우면 하느님이 좋아할 것 같아서 쓰고 남는 돈 가운데에서 기부를 시작합니다. 이건 무슨 하느님이 먹고 남은 것 받고 떨어지는 거렁뱅이 취급을 하면서 그들은 하느님을 정말 사랑한다고 착각을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에는 그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나는 온전히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농담처럼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별도 달도 다 따준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XX상조’ 직원이거나 ‘OO보험’ 영업사원일 뿐입니다. 혹시나 내가 탈이 날 때 마지막으로 기댈 곳 정도로만 삼고 나머지는 나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소비하고 소비하고 또 소비합니다.
위선자들!!!!
어둠의 세력이 내던지는 이적의 유혹에는 빠져들면서 하느님의 예언자들의 경고를 무시하는 이들입니다. 철저히 이기적이면서도 교묘하게 자신의 이기성을 감추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회칠한 무덤과 같은 이들입니다. 그들의 자선은 오염되어 있고 그들의 선행은 기만일 뿐입니다.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저마다 물으면서 요행을 바라는 이들이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은전 몇 푼에 팔아넘길 자들입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하느님은 그런 이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그치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또 하루를 ‘평온하게’ 살아갑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좀 더 눈에 좋은 것, 입에 맛나는 것, 귀에 듣기 좋은 것을 찾아서 다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날 그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릴 것을 모른 채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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