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볼리비아도 개가 많지만, 유럽도 만만찮게 개가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유럽에서 개는 단순한 개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의 일부’의 수준으로 다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개를 입양하는 법이 마련되어 있고 매일 일정 시간의 산책과 같은 기본적인 것들을 준수해야 하며, 년간 세금도 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난 주일 강의와 미사를 마치고 청년들과 간단히 나눔의 장소로 이동하는데 한 청년이 살짝 다가와 묻기도 했습니다.
“신부님, 강의 시간에는 질문을 못했는데요. 신부님이 강의 중에 개들에게도 나름의 혼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렇죠. 생물에게는 생혼이, 개들에게는 각혼이, 인간에게는 영혼이 존재하지요.”
“근데 천국에 가면 개들과 만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왜 마치 개들과 인간은 서로 다른 영혼을 지닌 것처럼 말하는 거죠?”
솔직히 말해서 무엇을 묻고자 하는 질문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우리가 천국에 가서 간절히 원한다면 얼마든지 우리가 사랑하던 개들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아니요, 왜 개들과 인간의 영혼에 차별을 두느냐구요.”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드는 느낌에 개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것 같긴 한데 그래서 개의 지위를 인간으로까지 격상시키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에게 마음을 쏟을 수는 있겠지만 개는 개지요. 개는 본능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 본능은 훈련받을 수는 있지만 인간의 영혼의 수준으로 격상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개는 인간처럼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고민하지는 않지요.”
하지만 그 청년은 썩 개운한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자신 안에 의문이 온전히 해소되지 않은 느낌을 그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의 모든 의문을 해소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다만 분명히 하나는 알려 주어야 했습니다.
“개가 참으로 이쁜 것은 이해를 하지만 개가 인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엄연한 현실이에요.”
그렇습니다. 개는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왜 개를 인간으로 만들지 않았느냐고 한다면 그건 하느님에게 여쭈어 보아야 할 일이겠지요. 개는 개일 뿐입니다. 우리가 소를 소라고 생각하고 잡아 먹는 것처럼 개는 개일 뿐입니다. 다만 그 본성에 인간과 더 친근하게 지낼 수 있는 요소들이 있어서 ‘반려동물’이라고 칭하고 더 가까이 지낼 뿐이지요. 개는 개입니다.
집에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때로 인간이 개를 특별히 사랑하는 것이, 단순히 그 개로서의 특성이 아니라 ‘인간됨’을 투사한다는 것을 말이지요. 인간이 다른 인간을 그렇게 사랑한다면 아마도 개의 사랑이 특별히 필요가 없을 것인데 거기에서 힘들고 지치니 개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지요. 개는 말을 하지 않고 많은 것을 수용하는 수동적 입장이기 때문에 인간은 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개가 언어를 습득해서 말을 하기 시작하고 우리와 똑같은 행동을 하면서 우리의 직장에서 우리와 소소한 일로 다투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개를 사랑하지는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저도 제가 키우던 캔이를 사랑하고 다른 개를 사랑하지만 어디까지나 개는 개일 뿐이고 개로서 사랑할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꺼이 보신탕도 먹습니다. 누군가 자기네 집 소를 사랑할 수는 있지만 그 소가 먹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지상의 모든 자연과 동물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것들입니다. 일부러 괴롭히고 사냥하고 죽일 필요는 없지만 인간의 굶주림을 위해서라면 희생되어 ‘음식’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간은 개와 ‘인간 수준의 사랑’을 나눌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 그렇게 착각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저마다의 대상과 그 수준의 사랑을 나눕니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쏟아 한 물건에 집착할 수 있습니다. 마치 젊은 여성이 최신 유행 핸드백에 마음을 쏟고, 청년이 새로나온 컴퓨터에 마음을 쏟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핸드백을 ‘배우자’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동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동물을 동물로서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필요없는 학대를 하거나 그 생명을 합당한 이유 없이 빼앗아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동물을 인간 수준으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는 이들은 착각을 하는 것이지요. 개들은 우리에게 순종하고 복종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는 늘 그들을 ‘아기’처럼 보살필 뿐이지 그들이 우리의 밥을 해 주거나, 나가서 돈을 벌어다가 우리를 봉양하지는 못합니다.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상대자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은 ‘신’과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하고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불가능해서, 아니 아예 그 자체가 가리워져서 인간의 수준에 머무르는 이들이 있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조차 힘들어서 동물의 수준에 머무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동물마저도 사랑하기 힘들어서 ‘소유와 탐욕’으로 대변되는 사물과의 사랑을 시도하는 이들도 있지요.
반려 동물은 ‘동물’입니다. 반려자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개를 입양하는 법이 마련되어 있고 매일 일정 시간의 산책과 같은 기본적인 것들을 준수해야 하며, 년간 세금도 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난 주일 강의와 미사를 마치고 청년들과 간단히 나눔의 장소로 이동하는데 한 청년이 살짝 다가와 묻기도 했습니다.
“신부님, 강의 시간에는 질문을 못했는데요. 신부님이 강의 중에 개들에게도 나름의 혼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렇죠. 생물에게는 생혼이, 개들에게는 각혼이, 인간에게는 영혼이 존재하지요.”
“근데 천국에 가면 개들과 만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왜 마치 개들과 인간은 서로 다른 영혼을 지닌 것처럼 말하는 거죠?”
솔직히 말해서 무엇을 묻고자 하는 질문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우리가 천국에 가서 간절히 원한다면 얼마든지 우리가 사랑하던 개들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아니요, 왜 개들과 인간의 영혼에 차별을 두느냐구요.”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드는 느낌에 개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것 같긴 한데 그래서 개의 지위를 인간으로까지 격상시키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에게 마음을 쏟을 수는 있겠지만 개는 개지요. 개는 본능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 본능은 훈련받을 수는 있지만 인간의 영혼의 수준으로 격상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개는 인간처럼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고민하지는 않지요.”
하지만 그 청년은 썩 개운한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자신 안에 의문이 온전히 해소되지 않은 느낌을 그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의 모든 의문을 해소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다만 분명히 하나는 알려 주어야 했습니다.
“개가 참으로 이쁜 것은 이해를 하지만 개가 인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엄연한 현실이에요.”
그렇습니다. 개는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왜 개를 인간으로 만들지 않았느냐고 한다면 그건 하느님에게 여쭈어 보아야 할 일이겠지요. 개는 개일 뿐입니다. 우리가 소를 소라고 생각하고 잡아 먹는 것처럼 개는 개일 뿐입니다. 다만 그 본성에 인간과 더 친근하게 지낼 수 있는 요소들이 있어서 ‘반려동물’이라고 칭하고 더 가까이 지낼 뿐이지요. 개는 개입니다.
집에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때로 인간이 개를 특별히 사랑하는 것이, 단순히 그 개로서의 특성이 아니라 ‘인간됨’을 투사한다는 것을 말이지요. 인간이 다른 인간을 그렇게 사랑한다면 아마도 개의 사랑이 특별히 필요가 없을 것인데 거기에서 힘들고 지치니 개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지요. 개는 말을 하지 않고 많은 것을 수용하는 수동적 입장이기 때문에 인간은 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개가 언어를 습득해서 말을 하기 시작하고 우리와 똑같은 행동을 하면서 우리의 직장에서 우리와 소소한 일로 다투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개를 사랑하지는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저도 제가 키우던 캔이를 사랑하고 다른 개를 사랑하지만 어디까지나 개는 개일 뿐이고 개로서 사랑할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꺼이 보신탕도 먹습니다. 누군가 자기네 집 소를 사랑할 수는 있지만 그 소가 먹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지상의 모든 자연과 동물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것들입니다. 일부러 괴롭히고 사냥하고 죽일 필요는 없지만 인간의 굶주림을 위해서라면 희생되어 ‘음식’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간은 개와 ‘인간 수준의 사랑’을 나눌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 그렇게 착각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저마다의 대상과 그 수준의 사랑을 나눕니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쏟아 한 물건에 집착할 수 있습니다. 마치 젊은 여성이 최신 유행 핸드백에 마음을 쏟고, 청년이 새로나온 컴퓨터에 마음을 쏟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핸드백을 ‘배우자’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동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동물을 동물로서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필요없는 학대를 하거나 그 생명을 합당한 이유 없이 빼앗아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동물을 인간 수준으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는 이들은 착각을 하는 것이지요. 개들은 우리에게 순종하고 복종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는 늘 그들을 ‘아기’처럼 보살필 뿐이지 그들이 우리의 밥을 해 주거나, 나가서 돈을 벌어다가 우리를 봉양하지는 못합니다.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상대자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은 ‘신’과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하고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불가능해서, 아니 아예 그 자체가 가리워져서 인간의 수준에 머무르는 이들이 있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조차 힘들어서 동물의 수준에 머무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동물마저도 사랑하기 힘들어서 ‘소유와 탐욕’으로 대변되는 사물과의 사랑을 시도하는 이들도 있지요.
반려 동물은 ‘동물’입니다. 반려자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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