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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징과 이적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요한 4,48)

눈으로 드러나는 피상적인 것에 자신의 소중한 것을 맡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영적 수준은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중요한 유리 공예품을 비닐봉지에 담아서 함부로 다루는 이들과 비슷합니다. 자칫 조금만 잘못 다루면 유리 공예품이 깨어지게 됩니다. 헌데 참으로 소중한 영혼의 가치인 믿음을 ‘보이는 것’에만 맡기니 그들은 속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다행하게도 성경 안에서 드러나는 표징과 이적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라서 속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안심하고 읽으면 됩니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에서는 ‘속이는 자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표징과 이적이 일어날 때에 올바른 분별이 없으면 속아 넘어가기 쉽고 전혀 엉뚱한 길을 가게 됩니다.

하늘에 구름이 생겼고 내가 그것을 보았다고 해서 내가 이튿날 나에게 힘든 일을 청하는 형제를 갑자기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일은 없습니다. 기적을 육적인 감각으로 느낀 이들에게 일어나는 회개는 냄비에 물이 끓는 것과 비슷한 현상입니다. 젊은 시절 성경 공부 연수를 2박 3일로 다녀오면 청년들은 온 세상을 구원할 것 같지만 그 열성은 불과 얼마 가지 못하고 식어버리고 맙니다. 그것은 그들이 전혀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우리의 일상 안에서 기적을 행하고 계십니다. 물론 우리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게 그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우연’이라고 불러 버리지요. 길가다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 왜 나에게 다가왔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만남과 관계 안에는 하느님의 손길이 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특히나 자신의 배우자에게 부정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을 때는 상황이 최악입니다. 둘이서 좋아서 자유의지로 동의를 하고 결혼을 했음에도 왜 그가 내 곁에 머무르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변이 180도로 변화되기를 기다리면서 그것이야말로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내가 돈 문제로 힘들면 그 문제가 일순간에 사라지면 그제서야 ‘기적이다!’라고 외쳐댑니다. 하지만 전혀 다른 의미의 기적이 이미 일어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그 문제를 통해서 그에게 당신의 손길을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사에서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또 돈에 자꾸 욕심을 내면 더욱 더 큰 문제를 불러 일으킨다는 것을 이미 일찍부터 가르쳐 왔음에도 그것을 전혀 이해하고 바라보지 못하는 이들은 오직 ‘기적’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다가 어리석게도 세상을 떠나고 말지요.

표징과 이적을 찾지 마십시오.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행복하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깨달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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