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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로원에서 한 강론

오늘은 칠곡 동명의 성가 양로원에 주일미사를 하러 갔습니다. 오늘의 만남 역시도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필연이라면 필연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지요. 발단은 지난 번의 어느 모임이었습니다. 제가 간 식당에서 저를 비롯한 한 그룹이 모여 있었는데 다른 테이블에 계시던 선배 신부님이 우연한 기회로 우리 테이블에 오셔서 함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던 차에 제가 볼리비아에서 온 줄을 아시고 저를 초대해 주셨지요. 그래서 냉큼 초대를 받았습니다.

팔공산 언저리에 있는 양로원은 요양원과 함께 있는 시설로 꽤나 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당은 그리 크지는 않더군요. 원래는 요양원 담당 신부님이 주례였는데 바꿔서 제가 주례를 하고 강론도 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읽고 강론을 시작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지구 반대편에서 선교 사목을 하고 있는 마진우 요셉 신부라고 합니다.”로 시작한 강론은 간단한 볼리비아의 소개로 이어졌고 뒤이어 어르신들을 향한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강론 준비는 물론 따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평소에 묵상한 것들을 꺼내어 놓았지요.

“사람의 외면은 시간이 흐르면 성장하고 나아가 노화되어 갑니다. 우리는 그 과정을 받아들여야 하지요. 하지만 인간의 내면에도 영혼이라는 존재가 있고 영혼도 역시 성장해 갑니다. 어린 시절 욕심을 내던 꼬마가 껍데기가 늙어 어른이 되어도 똑같은 욕심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의 영혼은 전혀 어른이 되지 못한 셈이지요. 어르신이 되면 얼굴에 주름이 생기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데 내면의 영혼이 그걸 수용하지 못하기에 점도 빼고 검버섯도 빼고 피부도 당겨 늘리고 하는 생쇼를 하는 셈입니다.

어르신이 된다는 것은 ‘지혜’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지혜는 무엇일까요? 제2독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지혜였습니다. 그분의 지혜는 우리에게는 어리석음이었지요. 예수님이 어디 계신가요? 십자가에 있지요? 왜요? 아주 나쁜 일을 많이 해서?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셨지만 죄많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지요. 그것이 그분의 지혜였습니다. 하지만 그 지혜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이었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만일 세상적으로 똑똑한 사제였다면 볼리비아에 갔겠습니까? 아닙니다. 세상적인 똑똑함이었다면 한국이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사제랍시고 용돈도 두둑히 챙길 수 있고 값비싼 취미 생활도 즐길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저는 예수님의 지혜를 선택했습니다.”

강론은 이어지고 이어져 ‘성전’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습니다.

“여러분 성전이 무엇인지는 잘 아시지요? 바로 우리의 몸이 성전입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는 기도하는 이, 즉 기도하는 영혼이 있어야 하지요. 지금 이 건물을 보십시오. 지금 이 건물은 ‘성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건물 안에는 기도하는 이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 요양원이 재정난으로 팔리고 나면 이 건물은 다른 이들이 들어와 디스코텍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더는 성전이 아니지요. 그 안에는 춤추고 노래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해서 이 건물은 더는 성전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몸 안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이 있다면 우리는 성전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이 ‘장사꾼의 영혼’이라면 더는 성전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런 우리에게서 도움의 손길을 걷어가실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우리의 돈과 기술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돈이 많다고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목숨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선교지에서 사제로 살면서 그것을 많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나이 든 분들도 언제인지도 모르게 세상을 떠나시고 젊은 청년도 죽고 심지어 갓난 아기도 죽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한계를 지닌 인간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더 많은 이야기를 해 드렸지만 다 기억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대충 흐름은 위와 같았습니다. 미사를 마치고는 많은 어르신들이 멀리서 온 선교 사제를 기쁘게 반겨 주셨습니다. 어르신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리면서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참으로 보람찬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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