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모두 형제다. (마태 23,8)
혹자는 이 성경구절을 통해서 가톨릭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즉,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라는 구절이 엄연히 있는데 우리는 신부를 ‘아버지(father)’로 부른다는 것이 그들의 비난사항입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육의 아버지조차 ‘아버지’라고 부르면 안되는 셈이지요. 그리고 스승이든 선생이든 그렇게 부르면 안된다는 것이 그들의 단순무식한 논리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성경을 그런 식으로 문자 그대로 해석해 버립니다. 피를 먹지 말라면 피를 안먹고, 토요일날 쉬라면 토요일날 쉬는 식이지요.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상을 본뜬 모든 것을 만들지 말라고 해서 가톨릭의 모든 성인상을 비난하기도 하지요.
이 성경 구절이 의도하는 바는, 참된 아버지의 위치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마땅히 존경심을 가져야 하고 섬겨야 합니다. 십계명에도 분명히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잘 적혀 있지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는 것은 홍길동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아버지로 오직 하느님을 마음 속에 간직하라는 의미이지요. 하느님이 우리 입에서 나오는 호칭을 늘 유념하고 있다가 ‘아버지’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장부에 적어놓고 나중에 꾸중할 각오를 다지시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라 불러도 됩니다. 신부는 신부(father)라고 불러도 됩니다. 다만 우리들 사이에 어느 누가 자신이 스스로 아버지의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아버지는 오직 하느님이시며 우리는 사실 모두 형제 자매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 내면의 방향을 잘 습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다보면 정말 엉뚱한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피가 중요하다고 수혈을 하지 않겠다는 엉뚱한 사고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무고한 피를 흘리는 것을 막고자 하셨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피를 얼마든지 내어주어도 상관 없습니다.
혹자는 이 성경구절을 통해서 가톨릭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즉,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라는 구절이 엄연히 있는데 우리는 신부를 ‘아버지(father)’로 부른다는 것이 그들의 비난사항입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육의 아버지조차 ‘아버지’라고 부르면 안되는 셈이지요. 그리고 스승이든 선생이든 그렇게 부르면 안된다는 것이 그들의 단순무식한 논리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성경을 그런 식으로 문자 그대로 해석해 버립니다. 피를 먹지 말라면 피를 안먹고, 토요일날 쉬라면 토요일날 쉬는 식이지요.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상을 본뜬 모든 것을 만들지 말라고 해서 가톨릭의 모든 성인상을 비난하기도 하지요.
이 성경 구절이 의도하는 바는, 참된 아버지의 위치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마땅히 존경심을 가져야 하고 섬겨야 합니다. 십계명에도 분명히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잘 적혀 있지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는 것은 홍길동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아버지로 오직 하느님을 마음 속에 간직하라는 의미이지요. 하느님이 우리 입에서 나오는 호칭을 늘 유념하고 있다가 ‘아버지’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장부에 적어놓고 나중에 꾸중할 각오를 다지시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라 불러도 됩니다. 신부는 신부(father)라고 불러도 됩니다. 다만 우리들 사이에 어느 누가 자신이 스스로 아버지의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아버지는 오직 하느님이시며 우리는 사실 모두 형제 자매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 내면의 방향을 잘 습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다보면 정말 엉뚱한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피가 중요하다고 수혈을 하지 않겠다는 엉뚱한 사고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무고한 피를 흘리는 것을 막고자 하셨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피를 얼마든지 내어주어도 상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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