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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

욕구라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욕구’가 있게 마련입니다. 욕구는 여러가지 형태로 드러납니다. 간단하게는 배고픔 부터 시작해서 무언가를 성취하고픈 욕구까지 다양하게 있지요.

근본적으로 우리는 ‘생존’에 대한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다양한 행위를 하게 되지요. 먹고 마시고 잠자고 따뜻한 체온을 유지하는 것과 같은 일련의 행위들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채워지고 나면 다른 욕구들이 슬슬 고개를 쳐듭니다. 이때 올바른 분별력을 내세우지 않으면 우리는 욕구들의 난잡한 싸움에 끼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괴롭게 만듭니다.

간단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목이 마른 것은 정당한 것이고 물을 마시면 해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이다를 마실 것인가 주스를 마실 것인가 하는 것은 나의 기호에 따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이다’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이다를 선택하기 위해서 고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이다라는 것의 존재를 알게 되고 나면 사이다라는 욕구가 생기게 되고 그와 상응하는 비슷한 다른 것과 비교를 시작하고 좀 더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 시간을 보내게 되는 등등의 일련의 활동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욕구를 지니는 만큼 우리는 더 번잡해 진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인간은 ‘불행’해 집니다.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른 인간은 불행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인 욕구는 충족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 인간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꾸만 다른 욕구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여러가지 것들을 보면서 그런 것에서 자꾸만 욕구를 불러 일으킵니다. 따뜻한 옷이 아니라 아름다운 옷을 추구한다면서 ‘미적 욕구’를 불러 일으키고 충분한 음식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요구한다면서 ‘식감의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식입니다.

욕구의 다양한 발생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라고 세상은 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부족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겨난 욕구들이 사라질 때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예를 들겠습니다. 한 여인이 자신의 미에 대한 욕구를 한껏 끌어올리기 시작합니다. 그 여인은 이러 저러한 화장법을 배우고 알게 되면서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머지 않아서 ‘노화’라는 것이 시작되게 됩니다. 그 여인은 자신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기 위한 방법을 수도 없이 연구해 왔는데 이 ‘노화’라는 것은 자신을 추하고 못나게 보이게 밀어 붙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슬퍼지게 됩니다. 아무리 멋진 화장을 해도 나이가 들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이가 80이 되었는데도 20대의 팽팽함을 지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나이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움의 욕구를 갈구하는 사람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슬퍼질 뿐입니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 욕구의 대상이 우리에게서 멀어져 갈 때에 우리는 우리가 즐긴 만큼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아이들은 여러가지 것들을 체험하고 즐깁니다. 그러나 그러면서 다른 한 편으로 ‘끝’이 있다는 것을 배울 필요도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마지막’이 있습니다. 영원한 것은 오직 하느님 뿐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인간의 욕구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안에 숨겨진 것은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영원한 것’을 욕구하지 않고 찰나적인 것을 원하는 만큼 그것을 잃을 때에 더욱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원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 뿐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에게 다가갈수록 더욱 충만해지는 이유는 바로 그분만이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겪는 여러가지 고통을 살펴보면 그만큼 그 안에는 세상을 향한 우리의 욕구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실체를 미리 파악하고 분별해 내는 사람은 방향을 전환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중독’ 상태에 머무르는 영혼은 그런 자신의 현실을 분별하지 못하고 결국 시간이 갈수록 더욱 짙은 어둠에 자신을 맡기게 됩니다.

인간의 고통은 축복입니다. 아프지 않으면 자신이 어디가 잘못된 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고통 당함으로써 본질을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데에 고통을 거쳐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고통을 즐기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미리 마음을 고통당할 대상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비밀을 깨닫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적지 않은 이들은 자신이 고통당할 거리를 스스로 찾아 다니고 있는 중입니다. 누가 우리를 이 어둠에서 구원할 것입니까?

저에게는 ‘에수 그리스도’ 외에는 이런 현실에서 우리를 이끌어낼 이름을 달리 찾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사는 이유이고, 그것이 제가 활동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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