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식사 메뉴는 츄라스꼬(석쇠에 구운 고기 덩어리)였습니다. 아프기 시작하면서 종종 ‘아, 정말 츄라스꼬 먹고 싶다’고 했더니 총회장 내외가 구워다 저녁 대신으로 먹으라며 주었습니다. 간만에 고기를 씹으니 얼마나 맛있던지요. 헌데 너무 오래 단단한 걸 씹지 않은 탓인지 이내 턱이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간만에 먹는 츄라스꼬의 맛은 일품이었습니다.
만일 늘 먹었다면 그런 감흥은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랜 절제의 시간 끝에 만나는 고기 한 덩어리라서 소중하고 맛있었던 것이지요. 한국 음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먹으면 별다른 감흥이 없습니다. 몇 년 좀 참다가 고국에 돌아가서 먹기 시작하면 음식 하나하나가 소중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즐기려면 ‘절제’가 뒤따라야 합니다. 모든 감각 기관이 만족한 상태를 유지하려다보면 언제나 더 큰 쾌락을 찾게 마련이고 결국 도를 넘는 쾌락을 찾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를 짓게 되는 것이지요. 절제라는 것은 참으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가치입니다. 우리의 본연의 기쁨을 되찾게 도와주고 우리를 늘 깨어있게 만들어 주니까요.
하지만 이 가치가 요즘 많이 사라져 있습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참고 기다릴 줄을 모릅니다. 하고 싶은 것이나 원하는 것이 생기면 그 즉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문하면 ‘당일 배송’을 하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인간은 그렇게 즉각적일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에 그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법은 없습니다. 시간이 걸리고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헌데 우리는 관계마저도 소비적입니다. 상대를 기다려주고 배려해주지 못합니다. 그렇게 상대를 다 소비하고 나면 이제 싫증이 나는 것이지요. 결국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에 있어서 교회가 가르치는 자연주기법이라는 것은 언뜻 고리타분해 보이지만 그런 내적인 절제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대를 모조리 즐겨버려 쾌락의 극치를 달리고 나면 자연 상대가 지겨워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니까요.
천천히 두고 보면서 서서히 다가갈 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안달하고 조급해한다고 좋을 것은 없습니다. 열매는 익어야 먹을 수 있습니다. 기다릴 줄 알고 참을 줄 알고 절제할 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만일 늘 먹었다면 그런 감흥은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랜 절제의 시간 끝에 만나는 고기 한 덩어리라서 소중하고 맛있었던 것이지요. 한국 음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먹으면 별다른 감흥이 없습니다. 몇 년 좀 참다가 고국에 돌아가서 먹기 시작하면 음식 하나하나가 소중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즐기려면 ‘절제’가 뒤따라야 합니다. 모든 감각 기관이 만족한 상태를 유지하려다보면 언제나 더 큰 쾌락을 찾게 마련이고 결국 도를 넘는 쾌락을 찾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를 짓게 되는 것이지요. 절제라는 것은 참으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가치입니다. 우리의 본연의 기쁨을 되찾게 도와주고 우리를 늘 깨어있게 만들어 주니까요.
하지만 이 가치가 요즘 많이 사라져 있습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참고 기다릴 줄을 모릅니다. 하고 싶은 것이나 원하는 것이 생기면 그 즉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문하면 ‘당일 배송’을 하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인간은 그렇게 즉각적일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에 그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법은 없습니다. 시간이 걸리고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헌데 우리는 관계마저도 소비적입니다. 상대를 기다려주고 배려해주지 못합니다. 그렇게 상대를 다 소비하고 나면 이제 싫증이 나는 것이지요. 결국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에 있어서 교회가 가르치는 자연주기법이라는 것은 언뜻 고리타분해 보이지만 그런 내적인 절제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대를 모조리 즐겨버려 쾌락의 극치를 달리고 나면 자연 상대가 지겨워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니까요.
천천히 두고 보면서 서서히 다가갈 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안달하고 조급해한다고 좋을 것은 없습니다. 열매는 익어야 먹을 수 있습니다. 기다릴 줄 알고 참을 줄 알고 절제할 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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