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휘발유통을 손에 들고 불 가까이 가는 아이를 보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백이면 백 서둘러서 그 아이를 가로막고 들고 있는 휘발유통을 빼앗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휘발유통이 뭔지 제대로 모를 것이 분명하고 불이 얼마나 쉽게 붙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얼마나 참혹할지 모르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엔 상황을 바꿔봅시다. 다 큰 어른이 그것도 의식이 분명한 어른이 휘발유통을 손에 들고 온 몸에 휘발유를 바른 채로 불 가까이로 다가간다면 어쩌시렵니까? 더군다가 여러분이 그 사람에게 오랬동안 휘발유와 불의 연관관계와 그 위험성을 가르쳐 왔다면 말이지요?
그는 알고 다가가는 것이고 그것은 분명한 그의 결정인 셈입니다. 그는 뭔가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설령 여러분이 지금은 그 앞을 막아선다 하더라도 그는 분명히 기회를 틈타서 다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이미 그 행위를 완성하기로 작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자유에서 선이 나오고 자유에서 사랑이 나오며 반대로 자유에서 악이 나오고 자유에서 증오가 비롯합니다.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선도 악도 저지를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그저 본능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할 뿐이지요. 그리고 그 본능의 기본은 ‘생존’이 될 것입니다. 세상 그 어느 동물도 일부러 자신의 생명을 상하게 하는 동물은 없습니다. 모든 동물은 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지요.
하지만 인간도 통상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육신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갖은 수단을 다 강구하지요. 그러나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는 의견을 달리합니다.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거나 거부하거나 하는 의식적 선택을 자기 스스로 분명히 합니다.
과연 그가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전혀 생각할 기회를 얻지 못했더라면 그는 그 책임을 덜 추궁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기회가 분명히 있었고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있었는데도 자신의 선택으로 영원의 생명보다 지상의 생명을 더욱 추구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적극적으로 거부해 왔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게 됩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훌륭한 보물을 주시면서 그와 동시에 내부에 교육 근거를 마련하셨습니다. 바로 ‘양심’이라는 기본적인 장치였지요. 만일 인간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 만이라도 훌륭하게 행동하고 살아간다면 설령 그리스도교적 선교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그를 아름답게 보실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양심을 거부한 이들, 더군다나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 몸담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이 지닌 보물을 소홀히 한 이들은 그에 상응하는 분명한 하느님의 정의가 그들에게 내려질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자비의 때가 지나고 나면 그분의 정의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하느님의 사랑과 더불어 분명한 당신의 내적 속성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지 않으며 당신 면전에서 그분을 욕보이기 일쑤입니다.
“간음을 저지르는 남자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가 나를 볼 수 있으랴? 어둠이 나를 감싸고 사방의 벽이 나를 숨겨 주니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내가 걱정하랴?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도 내 죄악들을 기억하지 못하시리라.’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의 눈이다. 그는 주님의 눈이 태양보다 만 배나 밝으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주님의 눈은 사람들의 온갖 행로를 지켜보시고 숨은 구석까지 낱낱이 꿰뚫어 보신다.”(집회서 23,18-19)
이번엔 상황을 바꿔봅시다. 다 큰 어른이 그것도 의식이 분명한 어른이 휘발유통을 손에 들고 온 몸에 휘발유를 바른 채로 불 가까이로 다가간다면 어쩌시렵니까? 더군다가 여러분이 그 사람에게 오랬동안 휘발유와 불의 연관관계와 그 위험성을 가르쳐 왔다면 말이지요?
그는 알고 다가가는 것이고 그것은 분명한 그의 결정인 셈입니다. 그는 뭔가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설령 여러분이 지금은 그 앞을 막아선다 하더라도 그는 분명히 기회를 틈타서 다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이미 그 행위를 완성하기로 작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자유에서 선이 나오고 자유에서 사랑이 나오며 반대로 자유에서 악이 나오고 자유에서 증오가 비롯합니다.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선도 악도 저지를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그저 본능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할 뿐이지요. 그리고 그 본능의 기본은 ‘생존’이 될 것입니다. 세상 그 어느 동물도 일부러 자신의 생명을 상하게 하는 동물은 없습니다. 모든 동물은 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지요.
하지만 인간도 통상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육신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갖은 수단을 다 강구하지요. 그러나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는 의견을 달리합니다.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거나 거부하거나 하는 의식적 선택을 자기 스스로 분명히 합니다.
과연 그가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전혀 생각할 기회를 얻지 못했더라면 그는 그 책임을 덜 추궁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기회가 분명히 있었고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있었는데도 자신의 선택으로 영원의 생명보다 지상의 생명을 더욱 추구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적극적으로 거부해 왔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게 됩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훌륭한 보물을 주시면서 그와 동시에 내부에 교육 근거를 마련하셨습니다. 바로 ‘양심’이라는 기본적인 장치였지요. 만일 인간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 만이라도 훌륭하게 행동하고 살아간다면 설령 그리스도교적 선교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그를 아름답게 보실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양심을 거부한 이들, 더군다나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 몸담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이 지닌 보물을 소홀히 한 이들은 그에 상응하는 분명한 하느님의 정의가 그들에게 내려질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자비의 때가 지나고 나면 그분의 정의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하느님의 사랑과 더불어 분명한 당신의 내적 속성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지 않으며 당신 면전에서 그분을 욕보이기 일쑤입니다.
“간음을 저지르는 남자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가 나를 볼 수 있으랴? 어둠이 나를 감싸고 사방의 벽이 나를 숨겨 주니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내가 걱정하랴?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도 내 죄악들을 기억하지 못하시리라.’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의 눈이다. 그는 주님의 눈이 태양보다 만 배나 밝으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주님의 눈은 사람들의 온갖 행로를 지켜보시고 숨은 구석까지 낱낱이 꿰뚫어 보신다.”(집회서 23,18-1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