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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기

물에 빠진 사람은 구하려는 시도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기도 수영을 할 줄 모르면서 물에 뛰어 드는 것은 자살행위에 불과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면 분별이 필요한 것이지요. 거기에는 몇가지가 포함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면에서도 분별이 요구됩니다.

1) 그는 어디에 빠져 있는가?
그가 빠진 곳이 어디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곳이 단순히 물이라면 뭐든 물에 뜰만한 것을 던져주거나 내가 수영을 잘한다면 들어가서 발을 받쳐 주던지 직접 끌고 나오던지 방법을 강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빠진 곳이 늪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곳에서는 보다 단단한 밧줄이 필요할 것입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그가 어디에 빠져 있는지를 살피고 준비를 하고 다가서야 합니다. 그가 그저 기분이 우울한 것이라면 그가 기분전환을 할만한 무언가를 함께 찾아보면 될 것이지만 그가 깊은 상실감이나 절망감, 누군가로부터 심한 타격을 입었다면 어느정도 준비를 하고 다가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그의 절망감에 같이 휩싸이고 맙니다.

2) 나에게 능력이 있는가?
이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수영도 못하면서 같이 물에 뛰어드는 것은 자살하는 것 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를 끌어낼 힘도 없으면서 밧줄을 몸에 묶고 던져주다가는 그가 당기는 바람에 도리어 나까지 끌려 들어가게 됩니다. 내가 힘이 없으면 구조 요청을 하러 가는 것이 상책입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한 영혼을 구하는 일은 호락호락한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책임질 수도 없으면서, 나 자신의 문제 만으로도 힘겨워하면서 누군가를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그를 도리어 더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는 그럴 준비가 된 이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가장 강력한 구원자이신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이지요.

3) 그는 살려는 의지가 있는가?
이 문제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함부로 분별할 문제는 아닙니다. 이는 보통사람이 분별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고도로 훈련되고 체험으로 숙달된 이가 분별할 문제입니다. 영적인 면에서 보면, 죽겠다는 시늉을 하는 사람이 실제로는 발을 땅에 대고 있고 키도 훨씬 크면서 지독한 악의로 다가오는 사람을 물에 빠뜨리려는 경우도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런 이들이 교회 안에 상당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선한 양심을 지닌 자들을 노리지요. 그들은 악의를 품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들을 몰락시킬 준비를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살려는 의지는 제쳐두고 아주 위험한 존재들이고 공동체의 이리와 같은 존재들이지요.

또한 살려는 의지가 없는 자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들을 대상으로는 가능한 선에서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나 그가 나의 가족일 경우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친구이고 나의 도움이 나의 선택에 달린 문제라면 신중히 분별을 해서 살 의지가 있는 이를 찾아보는 게 더 나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우리의 온갖 힘을 다 소진 시키고 나서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살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은 필수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도 분별이 필요하니 ‘살려는 의지를 흉내낸 악의적인 사람들’이 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분별은 참으로 미묘한 것이니 우리의 선의를 늘 유지하되 분별력을 잃으면 안됩니다. 예수님도 소경이든 누구든 살고 싶은지 열심히 물어 보셨습니다. 원치 않는 자에게 도움을 내미는 것은 특별한 경우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건 큰 착각입니다. 우리는 서로 힘을 실어 주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많은 이들은 목자가 아니라 양떼입니다. 목자의 역할을 나누어 받기 위해서는 내면의 영적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전한 수단은 그를 위한 간절한 기도입니다. 기도는 언뜻 가장 나약할 것 같지만 하느님의 마음을 울리는 기도는 반드시 그 힘을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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