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우리나라에 사제가 없던 시절에 프랑스에서 노랑머리 사제가 와서 어눌한 말로 미사를 집전했었다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볼리비아가 그런 셈이지요. 방인 사제가 부족해서 까망머리 사제가 와서 어눌한 스페인어로 미사를 집전합니다. 지금은 한국에 사제가 나름 넘쳐나서 대도시에는 차를 타면 어딜 가든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유럽이 그러하듯이 성당이 하나둘 문닫을 날도 머지 않은 셈이지요.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유럽에까지 사제를 보내는 상황이긴 하지만 이런 상황이 얼마 가지 못할 것은 뻔한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공허를 느끼고 거룩함을 추구하는데 막상 거룩함을 전해줄 이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의식있는 신자들은 많은데 자녀들에게 성소의 꿈을 키우는 신실한 부모는 적습니다. 이는 뭔가 잘못된 모습이지요. 우리는 NGO단체가 아니라 신앙 공동체이니까요. 신앙이 요구하는 사회의 정의를 실천해야 하지만 근본 싹은 신앙에서 나와야 하는데, 지금은 마치 유행처럼 신앙은 없고 정의만 남아가는 모습입니다. 유럽 사람들이 문화적으로는 신앙생활을 하지만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신앙의 삶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달까요? 제가 하는 걱정을 공감하는 분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사람들의 선호도는 이미 상당히 한쪽으로 치우쳐버린 모습입니다. 물론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돌에서도 아브라함의 후손을 일으키실 수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헌데 기왕이면 우리가 이미 지닌 좋고 아름다운 것들 안에서 더욱 튼실한 신앙을 가꾸어 나가면 좋지 않을까요? 젊은이 여러분들, 사제가 되지 않으시렵니까?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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