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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과 악인

자기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을 그 즉시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나 싫은 소리를 하는 이유가 자신의 오류에서 기인하는 것일 때 더욱 그러합니다. 나의 미완성에 대해서 상대의 충고를 듣게 되면 누구나 반감이 생기는 것이 기본적인 반응이지요.

하지만 인격이 완성되어 가는 이들은 그것을 ‘극복’하고 그 충고를 수용해서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는 더욱 더 성장해 가지요. 반면 부족한 이들은 그런 충고 앞에서 ‘회피’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충고를 하는 이들을 소중히 여기기는 커녕 공격을 하려 들지요. 하지만 절대로 그 앞에서 직접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그가 하는 말이 맞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숨어서 기회를 노립니다.

“그들은 칼처럼 혀를 벼리고 독한 말을 화살처럼 시위에 매겨 무죄한 이를 숨어서 쏘려 합니다. 느닷없이 그를 쏘고서는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악한 일을 단단히 꾸며 내어 덫을 놓자 모의하고서는 누가 자기들을 보랴고 말해 댑니다.”(시편 64,4-6)

이를 묘사하는 성경 구절은 많습니다. 가진 자는 더 가져 부유해지고 가지지 못한 이들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하는 부분이 대표적인 구절이지요. 이는 세상 부의 재분배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향해서 나아가는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더욱 더 큰 은총을 받아 선을 완성해 나가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가지고 있던 미흡한 선마저 내동댕이치고 악을 향해 질주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후 세계에 대해서 궁금해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세상을 기준으로 생각하지요. 행여라도 자기 가족이 지옥에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그럴 걱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누군가 어둠의 세계에 속한다면 그것은 그가 좋아서 거기로 간 것이기 때문이고 그에게는 희망이 일절 없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의 지상에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지는 동정심의 일말도 그에 대해서 가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훗날 우리는 그가 왜 거기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게 될 것이고 오히려 정의를 온전히 실천하시는 하느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매일의 순간에, 또 매 순간에 선택을 하지요. 그 선택의 최종 결과물이 우리의 사후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수없이 주어지는 기회를 우리는 잘 활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경우가 허다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화살로 쏘시리니 그들은 순식간에 상처를 입으리라. 그분께서 그들을 자기네 혀로 망하게 하시리니 그들을 보는 이마나 머리를 흔들리라. 이에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전하며 그분의 업적을 깨달으리라.”(시편 64,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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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를 모시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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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