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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합시다.

불교나 유교의 교리는 이치에 맞고 명확합니다.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간들이 알아듣게 풀어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대부분 이치에 맞지만 간혹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존재합니다. 삼위일체론이나 그리스도론, 그리고 성모님에 대한 교리와 같은 것들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받아들이는 이들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에도 명료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잠언과 같은 것들은 읽으면 그대로 거의 이해가 되고 수긍이 됩니다. 하지만 생명에 관한 내용에 있어서 하느님은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형제도를 반대하고 낙태를 반대하며 인공 수정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혹 신자분들 사이에 불교의 교리가 매력적이라고 하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충분히 이해하는 바이지만 조금은 부족한 표현입니다. 가톨릭의 교리에도 얼마든지 이치에 맞고 명확한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접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어서 저마다 자신이 접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뿐입니다. 그나마 요즘에는 저마다 스마트폰으로 카톡이나 카스, 페이스북과 같은 수단을 통해 전파되는 짤막한 글들을 읽으면서 그것이 마치 그 종교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을 하곤 합니다.

가톨릭은 2000년에 걸치는(구약까지 포함하면 그보다 훨씬 오래된) 풍부한 교리적 유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불교가 가르치는 바들을 이야기한 성인을 얼마든지 풍부히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깊고 더 초월적이며 실제적인 내용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결국 교리라는 것도 ‘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 이지적으로 만나자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혜민 스님이나 성철 스님의 글을 읽어도 다음날 미운 사람을 보면 똑같이 미워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불교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글을 접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도움이 되는 시기가 존재하니까요.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실천해 보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기왕이면 그러한 유산들을 가톨릭적인 배경 아래에서도 찾아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예수의 데레사 성녀의 저서들, 십자가의 성요한의 저서들,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의 자서전, 준주성범과 같은 저서들에서 보다 뛰어난 해석들을 발견하게 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좀 게으른 것이 사실입니다. 미사만 나가면 모든 ‘의무가’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이상은 하려고 들지 않지요. 심지어는 성경 통독도 해 보지 않은 신자분들이 수두룩합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의 기본 가르침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신앙생활을 하니 주변에서 이런 저런 좋은 것을 흘리면 넘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지요.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이나 신천지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는 셈입니다.

공부하셔야 합니다. 작은 시련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힘을 길러야 하고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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