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욕구는 강렬한 것입니다. 그리고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한번 쾌락을 맛 본 욕구는 늘 더 많은 쾌락을 추구하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중독’이 일어납니다. 세상은 ‘칭찬’을 하자고 하지만 때로는 칭찬도 ‘중독’될 수 있습니다. 내가 한 일에 사람들이 찬사를 보내면 은근히 다음부터 그만한 찬사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의 모든 욕구 속에는 동일한 본질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사랑받고 싶다’는 강렬한 내면의 바람입니다. 이는 하느님이 심어놓으신 것이지요. 하느님이 이를 심어놓으신 목적은 바로 ‘당신’을 찾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 안의 이 강렬한 욕구를 하느님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하기 때문에 엇나가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하는 기본적인 행위를 벗어나 하는 우리의 모든 활동은 더 행복해지기 위한 것이며 그 행복 안에는 ‘사랑의 욕구’가 숨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근본의 욕구 추구의 방향이 세상을 향해 돌려져 있으면 그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고독한 늑대가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고등학생때 성당에서 주최하는 가요 경연대회에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멋들어진 춤을 준비했고 나가서 노래하고 춤췄지요. 실은 그 준비 과정 자체가 중요하고 즐겁고 좋았던 것인데 거기에서 준우승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찬사가 쏟아졌지요. 그 뒤로 한참 동안을 멍청한 짓을 많이 했습니다. 그 찬사의 순간을 어떻게든 되살려 보려고 노력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사춘기 시절의 아이들이 다 그러하듯이 겉멋만 들어 다녔던 셈입니다. 한번 솟아오른 비행기는 다시 땅에 내려와야 한다는 아주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깨다는 데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려 합니다. 사람들의 이목의 중심이 되고 싶어하고 모든 대화에서 으뜸이 되고 싶어하지요. 그래서 그런 이들이 모여서 하는 대화에 참여해보면 피곤하기 그지 없습니다. 아무도 서로의 말을 듣지 않고 오직 자신이 말할 기회를 노리다가 기회가 오면 말을 쏟아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화려하고 현란한 언변이지만 그 안에는 이루 말할수 없는 공허가 가득 들어차 있지요.
자신이 체험한 일부터 시작해서, 가장 맛있었던 음식, 멋진 여행지, 신기한 체험, 심지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신기한 남의 체험까지 끌어와서 대화를 꽉꽉 채웁니다. 그렇게 한시간이 지나고 두시간이 지나서 서로 피곤해지기 시작하면 대화는 마치게 되지요. 그러나 그 안에는 아무런 소득이 없습니다. 듣지 않아도 그만인 이야기를 쏟아 놓기만 했으니까요. 말 그대로 철수네 강아지가 새끼를 낳든 말든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본질을 바라보기를 주저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많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직시하기 두려워합니다. 세상에서 참으로 힘든 일 중의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솔직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초라함은 지금까지 꾸며오려 했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 없기 때문이지요.
나는 이뻐야 해.
나는 인기 있어야 해.
나는 똑똑해야 해.
나는 재치 있어야 해.
나는 모든 지식을 알아야 해.
나는 친구들의 중심이 되어야 해.
이런 자가 최면 속에 살아오다가 자기 자신의 초라함을 직면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을 도망가 버리고 맙니다. ‘회피’를 하지요. 그리고 다시 예전의 환상을 찾아 헤메고 다닙니다.
예수님이 소중한 이유는 그분이 우리 안의 숨어 있는 초라함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훌륭한 하느님의 수술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전혀 똑똑하지도 생각만큼 아름답지도 않고, 설령 지금은 아름답더라도 그 아룸다움이 곧 지나가 버린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나는 별로 아는 것이 없고, 주변 인물들의 중심이 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작업을 해낸 사람은 비로소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에 솔직할 수 있으며 그분의 사랑을 간청할 수 있을 정도로 겸손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느끼면서 마침내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게 되지요.
우리는 많은 경우 허상을 살고 있습니다. 환상을 살고 있지요. 그리고 그 환상은 우리를 엄청난 유토피아로 초대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결국 나락으로 떨어뜨려 버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 자신만이 그것을 모르고 있지요. 우리는 타인의 모습을 관찰하고 분별할 줄은 알면서도 나 자신에게는 솔직하지 못한 셈입니다. 연예인의 자살 기사를 접하면서 그 안타까움을 느끼고 그 허망함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나는 그런 연예인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정말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욕구는 강렬합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십니다. 우리가 진정한 겸손으로 하느님에게 다가간다면 그분은 우리의 욕구를 넘어선 당신의 힘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욕구 속에는 동일한 본질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사랑받고 싶다’는 강렬한 내면의 바람입니다. 이는 하느님이 심어놓으신 것이지요. 하느님이 이를 심어놓으신 목적은 바로 ‘당신’을 찾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 안의 이 강렬한 욕구를 하느님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하기 때문에 엇나가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하는 기본적인 행위를 벗어나 하는 우리의 모든 활동은 더 행복해지기 위한 것이며 그 행복 안에는 ‘사랑의 욕구’가 숨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근본의 욕구 추구의 방향이 세상을 향해 돌려져 있으면 그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고독한 늑대가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고등학생때 성당에서 주최하는 가요 경연대회에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멋들어진 춤을 준비했고 나가서 노래하고 춤췄지요. 실은 그 준비 과정 자체가 중요하고 즐겁고 좋았던 것인데 거기에서 준우승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찬사가 쏟아졌지요. 그 뒤로 한참 동안을 멍청한 짓을 많이 했습니다. 그 찬사의 순간을 어떻게든 되살려 보려고 노력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사춘기 시절의 아이들이 다 그러하듯이 겉멋만 들어 다녔던 셈입니다. 한번 솟아오른 비행기는 다시 땅에 내려와야 한다는 아주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깨다는 데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려 합니다. 사람들의 이목의 중심이 되고 싶어하고 모든 대화에서 으뜸이 되고 싶어하지요. 그래서 그런 이들이 모여서 하는 대화에 참여해보면 피곤하기 그지 없습니다. 아무도 서로의 말을 듣지 않고 오직 자신이 말할 기회를 노리다가 기회가 오면 말을 쏟아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화려하고 현란한 언변이지만 그 안에는 이루 말할수 없는 공허가 가득 들어차 있지요.
자신이 체험한 일부터 시작해서, 가장 맛있었던 음식, 멋진 여행지, 신기한 체험, 심지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신기한 남의 체험까지 끌어와서 대화를 꽉꽉 채웁니다. 그렇게 한시간이 지나고 두시간이 지나서 서로 피곤해지기 시작하면 대화는 마치게 되지요. 그러나 그 안에는 아무런 소득이 없습니다. 듣지 않아도 그만인 이야기를 쏟아 놓기만 했으니까요. 말 그대로 철수네 강아지가 새끼를 낳든 말든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본질을 바라보기를 주저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많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직시하기 두려워합니다. 세상에서 참으로 힘든 일 중의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솔직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초라함은 지금까지 꾸며오려 했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 없기 때문이지요.
나는 이뻐야 해.
나는 인기 있어야 해.
나는 똑똑해야 해.
나는 재치 있어야 해.
나는 모든 지식을 알아야 해.
나는 친구들의 중심이 되어야 해.
이런 자가 최면 속에 살아오다가 자기 자신의 초라함을 직면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을 도망가 버리고 맙니다. ‘회피’를 하지요. 그리고 다시 예전의 환상을 찾아 헤메고 다닙니다.
예수님이 소중한 이유는 그분이 우리 안의 숨어 있는 초라함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훌륭한 하느님의 수술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전혀 똑똑하지도 생각만큼 아름답지도 않고, 설령 지금은 아름답더라도 그 아룸다움이 곧 지나가 버린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나는 별로 아는 것이 없고, 주변 인물들의 중심이 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작업을 해낸 사람은 비로소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에 솔직할 수 있으며 그분의 사랑을 간청할 수 있을 정도로 겸손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느끼면서 마침내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게 되지요.
우리는 많은 경우 허상을 살고 있습니다. 환상을 살고 있지요. 그리고 그 환상은 우리를 엄청난 유토피아로 초대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결국 나락으로 떨어뜨려 버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 자신만이 그것을 모르고 있지요. 우리는 타인의 모습을 관찰하고 분별할 줄은 알면서도 나 자신에게는 솔직하지 못한 셈입니다. 연예인의 자살 기사를 접하면서 그 안타까움을 느끼고 그 허망함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나는 그런 연예인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정말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욕구는 강렬합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십니다. 우리가 진정한 겸손으로 하느님에게 다가간다면 그분은 우리의 욕구를 넘어선 당신의 힘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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