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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을 살피기

우리의 두 눈은 안으로 나 있는 게 아니라 밖으로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곧잘 바깥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 안에도 눈을 심어 주셨습니다. 바로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우리 스스로 이 눈을 통해서, 이 영혼의 눈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살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세상의 것에 미혹되어가기 시작하고 바깥을 바라보는 훈련에 치중을 합니다.

내면을 바라보는 것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고 그것의 상관관계를 식별해 내는 데에 부모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일일이 사물들을 가리키며 이것은 무엇이고 저것은 무엇이다를 연신 반복하지요. 그렇게 우리는 외적 사물을 알아갑니다. 하지만 그와 상응하는 정도로, 아니 그보다 더한 정도로 내면을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정의인지, 정직의 가치는 무엇이며 인내가 왜 필요한지를 배워야 하지요. 하지만 그것을 알려줄 수 있는 부모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먼저 부모 자신도 그에 대해서 올바로 배운 적이 별로 없습니다. 기껏해야 몇가지 가치, 거짓말을 하면 안돼, 친구를 도와야 해 등등을 배우는 수준에 그쳤지요. 그렇다고 교회가 그것을 깊이 가르쳐주지도 못하는 실정입니다. 아이들은 성당 교리반에 가서 교리 지식을 습득하지 내면의 가치에 대한 훈련을 받지는 못합니다. 결국 이 교육은 가정이 기반이 되어야 하고 부모를 통해서 꾸준히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의 한국은 갈수록 자녀를 덜 낳는 추세에 있고 공동체적인 가치를 배우는 데에 극도로 미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부모는 학교에 가서 양보하고 나누고 서로 화해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가진 것을 절대 빼앗기지 말고 필요하면 가서 더 패고 오라고 가르치며 아이에게 ‘자기 중심성’을 더욱 강조하지요. 홀로 귀하게 자란 자녀들은 그렇게 자신 안에 서서히 갇히게 되고 장벽을 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돈은 얼마나 중시되는지 아이가 집에 와서 듣는 이야기라고는 온통 돈에 관련된 것 뿐입니다. 기도하는 가정은 찾아보기 드물고 아이들은 절로 재물의 가치에 대해서 매일 매일 습득하게 됩니다. 누가 돈을 얼마를 벌었는지, 그렇게 번 돈으로 무엇을 했는지, 새로운 상품이 가격이 얼마인지와 같은 것은 늘 들리는데 하느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시고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우리는 그분에게 얼마나 감사를 드려야 하는지와 같은 것은 배우기 힘이 든 세상이 되어 버렸지요.

그러는 통에 양심이 무디어집니다. 사이코패스는 어느 순간 툭 튀어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서서히 형성되어 가는 것이지요. 길에서 고양이를 만나면 그 생명력에 감탄을 보내기보다 잡아서 괴롭히고 죽여 버리면서도 그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아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아이가 어른이 되고나면 이웃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요. 누가 죽든 살든 내 일 아니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팽배하고 반대로 NIMBY(Not in my back yard: 내 뒷마당은 절대 안되!) 현상은 더욱 극심해지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디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 모를 정도이지만 그래도 일은 시작하고 보는 겁니다. 일단 우리의 양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부여하신 우리 영혼의 눈을 깨끗이 씻고 닦아 다시 내면을 바라보고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어두움들을 스스로 걸러내는 자체 정화를 잘 해야 합니다. ‘이 정도야 뭐’라고 하나씩 넘어가는 작은 악습들이 결국 큰 오류를 양산하게 됩니다. 마음 청소를 깨끗이 잘 하십시오. 악습을 버리고 선한 일을 실천하십시오. 그렇게 우리는 균형있는 사람이 되고 유혹이 많은 이 세상에서 올바로 걸어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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