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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에 숨겨진 하느님의 은총

내일부터 다시 주일미사를 거행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슬슬 일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이번 병고를 겪으면서 이런 저런 면에서 깨달은 것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서 새로이 체험하게 되었지요.

수다스러웠던 탓에 별로 느끼시지 못하시겠지만 인간의 생명은 한낱 입김에 불과합니다. 하느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가야 하는 것이고, 당신이 원치 않으면 아직 때가 아닌 것입니다. 헌데 우리는 그걸 깨닫지 못하고 젊은 동안 시간을 허비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파멸시키지요. 육적으로 영적으로 동시에 말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에 건강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온전한 몸을 지니고 있었지요. 물론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들입니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이끌어내는 사명이지요. 도움 없이는 살 수가 없기에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강하게 태어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지요. 아주 어릴 때부터 누구를 미친듯이 증오하고 앙심을 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은총으로 둘러싸여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지요.

헌데 우리 스스로 그 순수함을 깨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변의 영향도 받지만 우리가 자유의지를 마음껏 활용할 시기가 되면 지금까지 나에게 쌓여온 모든 것을 바탕으로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경우에 ‘파괴적 선택’을 합니다.

술과 담배로 몸을 망쳐가고 영적으로도 황폐해져 가기 시작하지요. 반면 세상에 대한 추구는 보다 가중되기 시작합니다. 멋진 삶을 살고 싶어하지만 어디까지나 세상 사람들이 떠받드는 삶일 뿐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그렇지 못한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당신의 일상적인 은총으로 우리의 삶을 유지시켜 주십니다. 이는 우리가 당연히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전적인 선의이고 자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매일 매순간 무시하면서 살아가지요.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영혼이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체험을 하지요. 그러면 그제서야 사람들은 깨닫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말이지요.

깨닫는 사람들은 그나마 평소에 하느님 생각을 조금이라도 해 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늦게라도 하느님의 은총을 갈구하게 되지요. 그러면 영원한 파멸에서 헤어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이들, 오직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던 이들은 마지막 은총의 시간도 헛되이 보내기 일쑤입니다. 그런 이들은 보통 엄청난 부와 명성에 사로잡혀 있던 자들, 자신의 삶을 자신이 꾸려 나간다고 착각하던 이들입니다. 이들은 병원에 와서도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병원의 온갖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내세우기 일쑤이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의사들도 그 병을 어찌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는 마지막 숨을 내뱉는 순간까지 열심히 투쟁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는 짓입니다. 차라리 하느님에게 자신의 의지를 맡겼더라면 하느님이 당신의 특별한 사랑으로 기적을 일으켰을 수도 있을 터인데 말이지요.

안타까운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사람들은 전혀 감을 잡지 못합니다. 그들은 오늘도 여전히 분주히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주함의 대부분을 헛된 곳에 마음을 두고 살아갈 것입니다. 반면 그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인들, 하느님의 백성들은 숨겨진 보화를 찾으면서 일상을 꾸려 나갈 것입니다. 틈나는 대로 기도를 바치고, 공연한 것에 정신을 팔지 않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성경을 펴들고 하느님을 호흡할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나날이 준비되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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