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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레미제라블이라는 영화에서 자신을 보살펴준 사제의 은기구들을 도둑질한 장발장은 경찰들에게 잡혀와서는 그 노사제의 용서를 받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영화를 보고 사제상에 대해서 하나의 이미지를 구축하게 됩니다. ‘용서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용서’라는 것에 대해서도 하나의 이미지를 구축합니다. 뭐든 일단 ‘눈감아 주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과연 용서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연애하던 시절에 술을 먹고 여자친구를 때리는 남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와서 여자에게 두손이 닳도록 빌기 시작합니다. 그럼 그 여자는 신앙심이 지극한 관계로 ‘용서’해 주기로, 즉 눈감아 주기로 합니다. 과연 이 남자는 다음번에 그 행동을 제어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비슷한 행동을 반복하게 될까요? 다른 예를 이. 한 아이가 도벽이 있습니다. 다른 이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을 너무나도 쉽게 합니다. 이 아이의 행위가 발각되었을 때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과연 그 아이를 진실로 용서해주는 행위일까요? 아니면 아이를 방치하는 행위일까요?

레미제라블이라는 영화는 일종의 성공신화와 같은 것입니다. 미천한 한 남자가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양심마저 어두워져 있다가 범죄까지 저지른 마당에 사제의 극진한 용서를 체험하고는 양선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변모한다는 이야기이지요. 이는 일종의 내면적 성공신화인 셈입니다. 실제의 세상은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는 마치 신데렐라 이야기와도 같은 것이지요. 미천한 신분이다가 요정 이모를 만나서 왕자와 결혼에 골인하는 것은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신데렐라가 훌륭한 사업 아이템이 있다거나 아니면 정말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외적 미모를 지니고 있다거나 아니면 영악해서 왕자와의 우연한 만남 속에서 왕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계획을 세우지 않는 이상은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일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요정 이모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 레미제라블 이야기로 돌아와서, 장발장과 같은 사람이 선량한 사람을 만날 가능성은 실제로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선함을 체험하고 마음을 바꾸는 경우보다는 반대로 그 선한 사람을 다시 등쳐먹는 경우가 세상 안에서 더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분별이 필요한 것이지요.

하나의 케이스가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의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분별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장발장의 경우를 주시했을 때에 그가 도둑질 한 번으로 다시 잡혀가서 다시 평생 옥살이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부당한 처벌이라는 분별이 있다면 그의 도둑질을 눈감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성요셉도 마리아에 대해서 그런 마음을 가졌지요. 성모님이 임신한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알려지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성요셉은 조용히 파혼하기로 합니다. 예수님도 간음하다 잡힌 여자가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는 그녀를 용서하고 돌려 보내지요. 하지만 어느 꼬마 아이가 도둑질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그릇되이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에 대해서는 아이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도록 분명하게 주의를 주고 합당한 제제를 가하는 것이 필요한 일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3)

우리는 옳고 그름에 대한 합당한 기준보다는 우리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 좋으면 좋은 행위이고, 우리가 보기에 나쁘면 나쁜 행위로 분별하는 경우가 많지요. 미사를 경건하게 참례하도록 노력하고 제발 미사 시간을 지켜 달라는 주임사제의 말이 성가시면 그는 나쁜 사제이고, 우리가 이런 저런 잘못이 있어도 별로 개의치 않고 여전히 환심을 사기 위해 우리에게 맛있는 걸 사주는 보좌 신부님은 좋은 신부님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눈감아 준다고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에는 합당한 회개가 필요한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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