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이 부르짖었을 때에 사람들은 그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기보다는 도리어 그를 가로막았습니다. 성가시게 하지 말라고 말이지요. 우리는 이런 일을 자주 합니다. 정말 필요한 만남을 성사시키기보다는 권위와 허례허식에 사로잡혀서 도리어 그것을 가로막고는 하지요. 이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지요.
예수님은 당신을 찾는 이들, 당신에게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이들을 만나고 싶어하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선물하려고 하시는 분이시지요. 헌데 우리는 중간에 끼어서 이런 저런 조건들 때문에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를 바라볼 게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을까요?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 때문에 일정한 만남을 유지하는 것 뿐일까요? 이 차이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사람들 사이에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정말 바라는 것에 무관심한 이들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사람들과의 만남에는 관심없고 그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하기를 바랍니다. 아니 무엇보다도 그들 자신이 예수님을 만날 마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의 마음을 확인합니다. 정말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으십니다. 소경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소경, 보지 못해서 생기는 불편함을 견디고 살아가는 소경에게 그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다만 소경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답, 즉 그의 자유의지로부터 나오는 답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소경은 구원의 소식을 듣습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은 ‘보아라’, ‘내가 볼 수 있게 해주마’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느낌의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 말이야말로 소경이 듣고 싶었던 말입니다. 소경은 단순히 볼 수 있는 것을 찾아다닌 사람이 아닙니다. 소경은 구원을 얻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소경의 마음 속에는 이미 앞에 계신 분이 여느 세상의 의사를 넘어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그분이 지나갈 때에 부르짖을 수 있었고 사람들이 그를 가로막아도 더 큰 소리로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소경 바르티메오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보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보게 해 달라고 청하지도 않고 행여 청하더라도 조금만 반대에 부딪히고 나면 용기를 잃고 그만 두곤 합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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