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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과 거부



어제는 세례 교육을 마치고 사람들이 우루루 모여 있었습니다. 평일미사인데 주일미사를 방불케 하는 수준이었지요. 대부분은 주일미사도 나오지 않는 어른들이었습니다. 자녀에게 어떻게든 세례는 주고 싶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앉아 있는 신자들이었지요. 얼굴을 보면 다 드러납니다. 미사를 마쳐야 참석표에 도장을 찍어준다고 해서 앉아있는 것일 뿐이지요. 그래서 덕분에 신앙교육을 실컷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 교육을 받아 왔지요. 선과 악을 구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그 분별 기준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어린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금방 답이 나옵니다. 어제도 한쪽 구석에 아이들 무리가 있어서 물어 보았습니다.

- 얘들아, 거짓말 해도 되니?
- 아니요~!
- 그럼 남편이 약한 아내를 때려도 되니?
- 아니요~!
- 도둑질은 해도 되는걸까?
- 아니요~!

우리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이런 것들을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머릿속에 지식을 지니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지요.

우리는 언뜻 선하고 좋은 것을 선호한다고 생각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전혀 정반대의 삶의 규칙에 얽매여 사는 사람이 있지요. 성경의 표현으로는 ‘죄의 노예’라고 합니다. 이들은 ‘쾌락’에 묶여 살아갑니다. 자신에게 쾌락을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들이고 그에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부하지요. 그래서 술이고 마약이고 위험한 성관계고 아무 상관이 없이 무작위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쾌락을 허용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거룩한 것, 첫인상에 지루한 것은 무엇이든 거부하게 됩니다. 그래서 미사, 성사, 기도, 성경읽기, 신심 활동과 같은 것은 무엇이든 거부하게 되지요.

좀 더 미묘하게 구분을 더하자면 쾌락 때문에 거룩한 것을 외적으로 받아들이는 ‘위선자’들도 존재합니다. 즉, 거짓으로 선을 좋아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선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을 좋아하는 이들이지요. 즉 사람들의 인기, 평판을 얻기 위해서 성당에서 활동하고 봉사하는 시늉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거짓 위선자들이지요.

어제 모인 사람들은 적어도 지독한 ’위선자’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삶의 방향이 뚜렷한 이들이었지요. 거룩한 것과는 아무 상관 없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강론의 방향은 뚜렸했습니다. 최소한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즉 방향을 돌이킬 수 있도록 성찰거리를 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었지요.

몇 명이나 내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중에는 비웃는 사람도 있고 잠이 드는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디스코텍이나 주점이라면 절대로 잠들지 않았을 것을 성당에서는 그 거룩한 분위기와 전례가 그에게 압박을 가해 잠들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들었습니다. 그리고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모두가 구원의 소식을 들었지만 모두가 그것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달려 인내 안에서 그것을 얻어내는 사람만이 결국 최후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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