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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발치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루카 10,39)

우리가 저마다 하는 일은 그 외적인 모양새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러한 외적인 모양새를 통해서 일의 ‘생산성’을 가늠하지요. 그리고 생산적인 일을 하는 사람을 부지런하고 좋은 사람, 반면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을 게으르고 나쁜 사람이라고 치부해 버립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빠가 집에서도 노트북을 열고 회사의 서류를 검토하고 남는 시간을 통해서 어학 공부를 하는 것을 두고 부지런하다고 하고, 반대로 아이들과 장난을 치고, 아내와 수다를 나누고 하는 남편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특히 이러한 경향이 신앙으로 넘어오기도 합니다. 신앙 안에서 뭐든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주히 뛰어가며 봉사를 하던지, 기도를 하더라도 단수를 정해두고 그 목표량을 채워야 하는 식으로 기도를 하는 이들이 있지요. 그런 행위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이런 이들의 마음가짐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을 바탕으로 타인을 심판하고 깔보기 시작할 때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이런 이들은 주님의 발치에 머물러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는 마리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게으름을 포장하는 이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일하기가 싫어서 자신의 영성은 침묵의 영성이라고 우겨대는 이들도 많지요. 참된 침묵은 올바른 분별 속에서 자신이 나서서 일해야 할 때와 가만히 앉아 머물러야 할 때를 올바르게 구분합니다.

마리아가 주님 발치에 머물렀다고 해서 나머지 시간을 멍때리고 있다고만 착각하시면 안됩니다. 마리아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이 오신 그 순간 주님의 발치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 집안 일을 돕고 열심히 살았을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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