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다가올 때 우리는 고통을 빨리 끝내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어느 조물도 고통을 피하도록 만들어져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후로 우리는 십자가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고통이라는 것은 단순히 의미없는 것,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후로 다가오는 고통에는 모두 의미가 담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는 고통을 막연히 피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아내와 신앙이 없는 남편이 함께 살 때, 그리고 그 와중에 남편이 아내의 신앙을 핍박할 때에 우리는 ‘갈라서라’고 쉽게 조언해주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일 ‘남편의 몫까지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결혼생활을 전혀 해 보지 못한 어느 사제의 생각없는 조언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거듭 말하거니와 고통을 단순히 피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고통에는 그 안에 내재된 의미가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 가운데에는 불필요한 고통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입니다. 불필요한 고통이 존재합니다. 즉, 고통이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을 일들이 존재하지요. 담배를 태우는 사람은 스스로 고통거리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욕심을 내는 사람도 그렇고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힌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런 어둠으로 인해서 야기되는 고통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고통들입니다. 내가 미리 끊어버릴 수 있었던 고통들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고집스럽게 그런 어두움들을 선택했고 결국 그런 고통들이 나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모든 것이 십자가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둠과 잘못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것들도 결국엔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십자가가 됩니다.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사람은 진실이 다가올 때를 감당할 준비를 해야 하는 법이지요.
우리가 지상에 머무는 동안 고통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고통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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