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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한 회개

회개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때의 결심이나 다른 특정한 뉘우침의 순간에만 회개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세상을 향한 욕구가 생생하게 살아있고 우리에게 유혹이 작용하는 한 회개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가 걸어왔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뉘우치곤 합니다. 마음 속에 이기심과 증오를 잔뜩 안고 걸어왔는데 스스로는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누군가의 가르침을 계기로 그러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지요. 그 순간의 방향전환은 강렬할 수 있고 실제적인 회개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이 계속되어 나가면서 우리는 다시 옛 즐거움에 빠져들곤 하는 것입니다.

피정때 가서 한 번 흘린 눈물로 우리의 회개가 ‘시작’될 계기는 될 수 있지만 절대로 ‘완성’되는 회개가 아닙니다. 우리의 회개, 하느님께로 돌이킴은 일상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 속에 죽음에 이르기까지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어둠은 아주 교묘하게 우리의 마음을 잠식해서 엉뚱한 씨앗을 뿌리고 갑니다. 그런 씨앗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방치해 두면 결국 싹이 트고 자라서 내 안에 커다란 나무를 형성해 버리곤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정말 사랑하게 되어 기쁨을 가지고 일하던 중에, 마음 안에 뿌려진 ‘교만’이라는 싹이 점점 자라나서 자기 스스로를 엄청난 사람으로 간주하게 되고 다른 이의 진실한 충고를 전혀 듣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스스로의 모습은 자기 스스로 발견하기는 참으로 힘든 법입니다. 이는 마치 매일같이 바라보는 자기 얼굴을 보면 그러려니 하지만, 다른 타지에서 오래간만에 만난 친척이 내 얼굴을 보면 ‘어, 너 많이 변했네?’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회개는 꾸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반성과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고독’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침묵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고 우리는 우리가 자주 접하는 것에 익숙해져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인간적 만남’에만 지나치게 치중하기 시작한다면 결국에는 그 만남 안에서 공연한 생각의 씨앗들을 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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