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구름에 가려져 계십니다. 하지만 그분이 흐릿한 게 아니라 우리의 시선이 흐릿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능력의 한계로 인해서 하느님을 올바로 ‘직관’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모습이 구름에 가린 듯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분이 신뢰할만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나약함, 우리의 부족함이 그분을 신뢰하는 것을 가로막는 셈이지요. 벼랑으로 떨어지다가 나무 뿌리 하나를 겨우 붙들었는데 실은 발 아래 1미터에 굳건한 땅이 있는데도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으니 죽자고 나무뿌리를 꼭 쥐고 있는 셈입니다. 그 나무뿌리는 세상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이 될 수도 있고, 명예, 권력이 될 수도 있고, 우리의 미모, 건강 따위가 될 수도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단 내려와 하느님이라는 땅에 발을 디디고 나면 하느님께서 필요한 나무뿌리를 지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그 나무뿌리들을 붙들고 다시 올라가 여전히 매달려 있는 이들에게 아래에 땅이 있다는 것을 설득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죽자고 자신이 붙어 있는 나무 뿌리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집착’이라고 합니다. 시선을 넓히면 얼마든지 다른 수많은 기회를 볼 수 있는데 지금 눈 앞의 것에만 매달리는 모습을 집착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이런 집착은 신앙인들 안에서도 얼마든지 관측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하나의 옵션으로 지니고 살 뿐이고 그것을 자신의 굳건한 바닥이라고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무 뿌리에 해가 가는 상황이 되면 언제라도 신앙부터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지요. 신앙 공동체 안에서 다른 이와 다투어 자존심이 상했다고 미사에 나오지 않고, 신부님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미사에 나오지 않고, 새 성전을 짓는데 건축 기금이 부담이 될 것 같으니 미사에 나오지 않는 식의 일이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오류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는 성인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그 안에는 여전히 못된 사람들도 있고, 부족한 모습의 사제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걸 알고도 나라는 존재를 그 공동체 안에 집어 넣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부족함을 내가 가진 탈렌트로 채우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반대로 그들의 부족함을 비난하면서 하느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명을 저버리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지요.
피하기만 하는 사람은 결국 비슷한 류의 어려움을 다시 다른 곳에서 마주합니다. 신앙도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겪어야 할 일이 있고 극복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피하기만 하는 것으로는 문제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잡고 있는 나무뿌리를 손에서 놓고 뛰어 내려야 하고, 몸이 긁혀 상처가 날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하지만 일단 땅을 밟고 나면 그때부터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굳은 땅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 그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다시 벼랑을 기어올라갈 수 있고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아래에 굳은 땅이 있다는 걸 알려줄 수 있는 용기를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그들은 열매를 맺는 자들이며,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입니다. 그들에게서 나는 향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들은 기쁨의 향기를 지니고 있으며, 인내와 평화, 관용과 친절, 온유와 사랑의 향기를 마음껏 발산합니다. 그들은 빛이고 소금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러한 이들을 빚을 수 있는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아멘. 아멘.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분이 신뢰할만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나약함, 우리의 부족함이 그분을 신뢰하는 것을 가로막는 셈이지요. 벼랑으로 떨어지다가 나무 뿌리 하나를 겨우 붙들었는데 실은 발 아래 1미터에 굳건한 땅이 있는데도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으니 죽자고 나무뿌리를 꼭 쥐고 있는 셈입니다. 그 나무뿌리는 세상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이 될 수도 있고, 명예, 권력이 될 수도 있고, 우리의 미모, 건강 따위가 될 수도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단 내려와 하느님이라는 땅에 발을 디디고 나면 하느님께서 필요한 나무뿌리를 지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그 나무뿌리들을 붙들고 다시 올라가 여전히 매달려 있는 이들에게 아래에 땅이 있다는 것을 설득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죽자고 자신이 붙어 있는 나무 뿌리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집착’이라고 합니다. 시선을 넓히면 얼마든지 다른 수많은 기회를 볼 수 있는데 지금 눈 앞의 것에만 매달리는 모습을 집착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이런 집착은 신앙인들 안에서도 얼마든지 관측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하나의 옵션으로 지니고 살 뿐이고 그것을 자신의 굳건한 바닥이라고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무 뿌리에 해가 가는 상황이 되면 언제라도 신앙부터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지요. 신앙 공동체 안에서 다른 이와 다투어 자존심이 상했다고 미사에 나오지 않고, 신부님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미사에 나오지 않고, 새 성전을 짓는데 건축 기금이 부담이 될 것 같으니 미사에 나오지 않는 식의 일이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오류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는 성인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그 안에는 여전히 못된 사람들도 있고, 부족한 모습의 사제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걸 알고도 나라는 존재를 그 공동체 안에 집어 넣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부족함을 내가 가진 탈렌트로 채우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반대로 그들의 부족함을 비난하면서 하느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명을 저버리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지요.
피하기만 하는 사람은 결국 비슷한 류의 어려움을 다시 다른 곳에서 마주합니다. 신앙도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겪어야 할 일이 있고 극복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피하기만 하는 것으로는 문제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잡고 있는 나무뿌리를 손에서 놓고 뛰어 내려야 하고, 몸이 긁혀 상처가 날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하지만 일단 땅을 밟고 나면 그때부터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굳은 땅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 그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다시 벼랑을 기어올라갈 수 있고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아래에 굳은 땅이 있다는 걸 알려줄 수 있는 용기를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그들은 열매를 맺는 자들이며,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입니다. 그들에게서 나는 향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들은 기쁨의 향기를 지니고 있으며, 인내와 평화, 관용과 친절, 온유와 사랑의 향기를 마음껏 발산합니다. 그들은 빛이고 소금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러한 이들을 빚을 수 있는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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