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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위

여러가지 행위(특히 면벌부의 구입이라는 방식의 예물 봉헌을 통한 자선)를 강조해서 신자들에게 구원에 가까이 다가가라고 가르치던 가톨릭에서 설교자들의 금전적인 부패가 만연하던 당시 95개조 반박문을 내어놓은 루터는 신자들에게 순수한 믿음만 굳건하면 절로 행위가 따라오게 될 것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오직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루터의 의도와는 달리 안타깝게도 ‘믿음’만을 엉뚱하게 강조하는 풍조가 뒤따라왔고 결국 행위는 없고 믿음만 강조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아는 현실입니다.

개신교 형제들의 분리는 가슴아픈 일이었지만 우리에게 여러가지 면에서 배울 점을 시사해 주었습니다. 그들의 성경에 대한 열정으로 가톨릭에서도 뒤늦게 성경 말씀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났고 그들의 선교 열정에 우리도 늘 자극을 받고 있지요. 하지만 다른 쪽으로도 배울 점이 있으니 일단 한 번 갈라지고 나면 다시 새로운 갈라섬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개신교는 수많은 종파와 그 종파별로 또다시 세분화된 분파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저마다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지요. 그리고 앞으로도 또 얼마나 갈라설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믿음은 우리 신앙인의 근본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행위의 결과를 가져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행위들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데에 있어서 가톨릭은 풍부한 영적 자산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험성은 늘 존재합니다. 자칫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 믿음으로만 빠져들 위험성과 영혼 없는 행위로만 빠져들 위험성이지요. 그래서 늘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순수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헌데 그 믿음이 순수해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믿는 바를 실천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 스스로의 실천으로 인해 증명되어 갈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욱 굳건해지고 순수해지게 될 것입니다.

행위 없는 믿음은 실체없는 허상에 불과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자는 그 믿음을 증명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나서서 그에게 그런 기회를 제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만 주님 주님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바를 고백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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