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사도 28,31)
바오로 사도의 핵심 선포 내용은 두가지 뿐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교리에 관해서 복잡하게 생각하고 참으로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배워야 할 것은 많은 것이 사실이나 의외로 복잡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굉장히 단순합니다.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지요.
예를 들어봅시다. 용서하라고 예수님은 가르쳤습니다. 참으로 단순하고 명료한 가르침입니다. 헌데 우리는 용서를 죽어도 못하겠다고 맞섭니다. 그래서 일이 복잡해지는 거지요. 그럼 왜 용서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우리의 소관이니까요. 우리가 로봇이었다면 차라리 아무런 결정 없이 프로그램 된 대로 따라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개입되면서 일은 복잡해지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나라는 다가옵니다. 아니 이미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나라의 일원이 되고 그 나라를 살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십니다. 수난 당하시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왜냐구요?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우리의 나라와 우리의 욕구를 따르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따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은 것이지요. 이 원초적인 이기성이 우리의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느님의 뜻을 진실하게 따르는 사람은 굉장히 단순합니다. 그의 마음에는 오직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 밖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는 오직 하느님의 나라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주변에 전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그는 상당히 많은 반대에 부딪히게 될 것이고 그의 삶은 여느 다른 삶보다 복잡해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때문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 때문입니다. 온갖 시기와 질투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온갖 복잡한 술수로 그를 넘어뜨리려고 시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풍랑 가운데에서 주무셨던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그 역시도 그 온갖 복잡함 속에서 안식을 취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핵심 선포 내용은 두가지 뿐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교리에 관해서 복잡하게 생각하고 참으로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배워야 할 것은 많은 것이 사실이나 의외로 복잡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굉장히 단순합니다.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지요.
예를 들어봅시다. 용서하라고 예수님은 가르쳤습니다. 참으로 단순하고 명료한 가르침입니다. 헌데 우리는 용서를 죽어도 못하겠다고 맞섭니다. 그래서 일이 복잡해지는 거지요. 그럼 왜 용서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우리의 소관이니까요. 우리가 로봇이었다면 차라리 아무런 결정 없이 프로그램 된 대로 따라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개입되면서 일은 복잡해지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나라는 다가옵니다. 아니 이미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나라의 일원이 되고 그 나라를 살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십니다. 수난 당하시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왜냐구요?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우리의 나라와 우리의 욕구를 따르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따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은 것이지요. 이 원초적인 이기성이 우리의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느님의 뜻을 진실하게 따르는 사람은 굉장히 단순합니다. 그의 마음에는 오직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 밖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는 오직 하느님의 나라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주변에 전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그는 상당히 많은 반대에 부딪히게 될 것이고 그의 삶은 여느 다른 삶보다 복잡해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때문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 때문입니다. 온갖 시기와 질투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온갖 복잡한 술수로 그를 넘어뜨리려고 시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풍랑 가운데에서 주무셨던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그 역시도 그 온갖 복잡함 속에서 안식을 취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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