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루카 9,25)
인간은 가장 고통스러울 때에 자신의 본모습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신학교 4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었습니다. 하지만 신학교에서 공동체 생활에 훈련이 되어있던 저로서는 군대에서 처음 접하는 생활들은 크게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군대라는 곳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절대적으로 다른 것은 군대는 ‘생존’을 훈련하고 타인을 ‘공격’하는 것을 배우는 장소라는 것이었고 반대로 신학교는 ‘자기를 버림’을 훈련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장소라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머지 않아 찾아왔습니다. 훈련소 생활 몇주가 지나지 않아서 군대 안에서 늘 그렇듯이 소소한 사건은 벌어졌습니다. 저는 식기 담당을 하고 있었고 식판의 숫자와 숟가락의 숟자는 절대적인 것이었지요. 헌데 숟가락이 모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생으로서 죽는 법을 학문적으로 열심히 배우고 노력해온 저의 양심은 괴로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군대에서는 도둑질이 없고 소위 ‘위치 이동’만 존재할 뿐이라지만 그래도 그건 어디까지나 변명일 뿐이고 그러한 행위는 타인이야 고통받건 말건 나만 살면 된다는 분명한 이기성의 발로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위협과 두려움 앞에 내몰린 저의 양심은 보기 좋게 무너졌고 저는 훌륭히 ‘위치 이동’을 수행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군인으로서 생존하기 위해 살아 남았지만 반대로 제가 그동안 훈련해 온 이타성과 사랑이라는 것이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체험한 것이었지요. 그러한 일은 그 뿐만이 아니었고 군생활 2년 내내 간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저의 믿음은 보기좋게 바닥을 내리친 것이었지요.
그 덕에 저는 겸손해질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이론적으로 쌓아왔다고 생각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오직 진실한 삶의 실천만이 내가 진정으로 지닐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삶이었지요. 군대를 마치고 다시 시작된 신학교 생활은 조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신앙을 ‘살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리고 다만 제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바탕으로 내가 ‘신학생입네’ 하고 우쭐댈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겸손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저의 삶에 박혀 나갔지요.
아마 그것이 지금의 저를 지탱하는 기본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를 함부로 높여 보지 않습니다. 저의 현실을 잘 알고 있고 제가 나약하고 모자라며 곧잘 쓰러지곤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이번 병원 신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저의 건강을 과신했고 하느님은 그 즉시 저의 그릇된 습관을 드러내는 결과를 제가 체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육신 생명을 보다 책임감 있게 잘 돌보아야 했지요.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습니다. 이는 사실 세상 사람들이 이미 알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에 관한 진리이지요. 사람들은 자신의 육신 생명을 보호하는 데에는 선수이지만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올바로 감을 잡지 못하고 소홀히 다루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원래 주어진 육신 생명이 끝나면 마감될 나약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죽음의 씨앗을 품고 태어나는 것이지요. 아무리 날고 기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은 죽습니다.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러니 그 동안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존’을 위해서 부단히 보다 참된 가치들은 내던지는 중이지요. 정직, 성실, 책임감, 온유, 관용, 사랑, 희생, 겸손, 기도, 인내와 같은 가치들은 돈, 명예, 권력보다 분명히 중요한 것인데도 사람들은 돈과 명예와 권력, 건강, 미모와 같은 것을 얻기 위해서 앞서의 가치들을 쉽게 내던지곤 합니다. 그들은 텔레비전은 보면서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친구들과 수다는 떨면서 성체 앞에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친구의 결혼식에는 부주돈을 들고 달려가면서 평일미사는 귀찮아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새 옷은 몇십만원을 희생해도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길가다 마주치는 걸인에게는 동전 한 푼에 바들바들 떱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과연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인간은 가장 고통스러울 때에 자신의 본모습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신학교 4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었습니다. 하지만 신학교에서 공동체 생활에 훈련이 되어있던 저로서는 군대에서 처음 접하는 생활들은 크게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군대라는 곳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절대적으로 다른 것은 군대는 ‘생존’을 훈련하고 타인을 ‘공격’하는 것을 배우는 장소라는 것이었고 반대로 신학교는 ‘자기를 버림’을 훈련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장소라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머지 않아 찾아왔습니다. 훈련소 생활 몇주가 지나지 않아서 군대 안에서 늘 그렇듯이 소소한 사건은 벌어졌습니다. 저는 식기 담당을 하고 있었고 식판의 숫자와 숟가락의 숟자는 절대적인 것이었지요. 헌데 숟가락이 모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생으로서 죽는 법을 학문적으로 열심히 배우고 노력해온 저의 양심은 괴로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군대에서는 도둑질이 없고 소위 ‘위치 이동’만 존재할 뿐이라지만 그래도 그건 어디까지나 변명일 뿐이고 그러한 행위는 타인이야 고통받건 말건 나만 살면 된다는 분명한 이기성의 발로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위협과 두려움 앞에 내몰린 저의 양심은 보기 좋게 무너졌고 저는 훌륭히 ‘위치 이동’을 수행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군인으로서 생존하기 위해 살아 남았지만 반대로 제가 그동안 훈련해 온 이타성과 사랑이라는 것이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체험한 것이었지요. 그러한 일은 그 뿐만이 아니었고 군생활 2년 내내 간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저의 믿음은 보기좋게 바닥을 내리친 것이었지요.
그 덕에 저는 겸손해질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이론적으로 쌓아왔다고 생각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오직 진실한 삶의 실천만이 내가 진정으로 지닐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삶이었지요. 군대를 마치고 다시 시작된 신학교 생활은 조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신앙을 ‘살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리고 다만 제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바탕으로 내가 ‘신학생입네’ 하고 우쭐댈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겸손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저의 삶에 박혀 나갔지요.
아마 그것이 지금의 저를 지탱하는 기본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를 함부로 높여 보지 않습니다. 저의 현실을 잘 알고 있고 제가 나약하고 모자라며 곧잘 쓰러지곤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이번 병원 신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저의 건강을 과신했고 하느님은 그 즉시 저의 그릇된 습관을 드러내는 결과를 제가 체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육신 생명을 보다 책임감 있게 잘 돌보아야 했지요.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습니다. 이는 사실 세상 사람들이 이미 알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에 관한 진리이지요. 사람들은 자신의 육신 생명을 보호하는 데에는 선수이지만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올바로 감을 잡지 못하고 소홀히 다루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원래 주어진 육신 생명이 끝나면 마감될 나약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죽음의 씨앗을 품고 태어나는 것이지요. 아무리 날고 기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은 죽습니다.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러니 그 동안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존’을 위해서 부단히 보다 참된 가치들은 내던지는 중이지요. 정직, 성실, 책임감, 온유, 관용, 사랑, 희생, 겸손, 기도, 인내와 같은 가치들은 돈, 명예, 권력보다 분명히 중요한 것인데도 사람들은 돈과 명예와 권력, 건강, 미모와 같은 것을 얻기 위해서 앞서의 가치들을 쉽게 내던지곤 합니다. 그들은 텔레비전은 보면서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친구들과 수다는 떨면서 성체 앞에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친구의 결혼식에는 부주돈을 들고 달려가면서 평일미사는 귀찮아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새 옷은 몇십만원을 희생해도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길가다 마주치는 걸인에게는 동전 한 푼에 바들바들 떱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과연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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