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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다가오는 주일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언급을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겠지요.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시간과 공간에 묶여 있는 우리로서는 이해하기가 힘이 듭니다. 아무리 연상하고 떠올려봐도 세 개를 하나로 묶는다는 생각(1+1+1=1)은 뭔가 이해하기 힘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삼위일체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계시’된 것입니다. 바로 이 주일날의 복음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지요. 그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파견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바로 여기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등장하는 것이지요. 세례의 기본 양식이며 그 세 분이 같은 지위의 하느님이라는 것, 하지만 실제적인 인류의 역사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부는 창조주이시고 ‘아버지’라 불리는 분입니다. 성자는 외아들이신 예수님이시고 인간이 되어 인류의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다가와 당신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신 분이시지요,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와 우리 각자의 영혼 속에 자리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한 몸을 이루게 하는 분이십니다. 헌데 이 세 분은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지요.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이 모호한 표현 속에서 인간은 많은 오류를 저질렀습니다. 세분을 떼어 이해하려고 하거나, 세분을 모두 뭉뚱그려 이해하려고 한 오류가 대표적이지요. 그리고 매 순간마다 교회는 나서서 그렇지 않다고 방어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개념들이 함께 파생되었지요. 위격으로는 삼위이고 본체로는 하나라는 표현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표현을 달리 했을 뿐,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삼위일체는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건 마치 거대한 빌딩 하나를 작은 박스 속에 우겨 넣으려는 시도와 같지요. 아니, 거대한 빌딩 정도가 아니라 하나의 도시를 작은 상자 안에 담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신비하게도 우리는 삼위일체에 ‘참여’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그 삼위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지요. 성령을 받아 거기에서 비롯하는 같은 사랑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사랑으로 성자를 사랑하며 나아가 다른 성령을 받은 모든 이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지상에 머무는 동안 이해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갈 수는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삼위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부를 창조주로 사랑하고 성자를 구세주로 사랑하며 성령을 위로자로 우리 영혼 안에 받아들여 사랑한다면 우리는 이미 삼위일체를 실제의 삶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수많은 신학자들의 오류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삼위일체를 말로, 논리로 설명하려고 하니 실패한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도 자신이 믿는 바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비록 신학의 ‘신’자도 모르지만 이미 삼위일체를 마음 깊이 이해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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