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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의 축복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마르 10,29-31)

제가 최근 병으로 쓰러졌을 때에 사실 저로서는 막막했습니다. 같이 사는 신부님은 휴가로 한국에 가 있고, 집에 가정부가 있긴 했지만 수당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라 정확히 오후 2시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근하는 사람인지라 저는 며칠 밤을 아픈 배를 움켜쥐고 신음해야 했습니다. 헌데 어느날 저녁 저에게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Padre como está?”(신부님 괜찮아요?)

주일 미사 동안 힘들어하는 저를 본 자매가 문자를 보냈습니다. 진심으로 저를 걱정하는 문자였지요. 그리고 단순히 한 통이 아니었습니다. 문자는 여러 명에게서 왔고 저를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솔직한 제 상태를 말했고 그 자매들은 기꺼이 다음날 집을 방문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 상태를 보고는 저를 병원에 데려가고 자기들끼리 순번을 짜서 저를 돌보기 시작했지요.

저는 이곳에 가족이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이역만리 땅에 친척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혀 다른 의미의 가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제가 열심히 사랑했던 본당 식구들이 기꺼이 위기의 순간에 저의 가족이 되어 주었습니다. 제가 입원해 있는 6일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그녀들은 한 순간도 빠짐없이 저를 돌보았고 심지어 밤도 병원의 불편한 의자에서 보내었습니다.

복음의 말씀은 하나도 틀린 게 없습니다. 복음 때문에 내려놓은 것은 현세에서도 되갚음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물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박해도 존재하지만 축복도 존재합니다.

한날은 병원에서 정신이 들어 제 곁을 지니고 있는 자매에게 감사를 드렸습니다.

- 자매님, 정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이렇게 돌보아 주셔서요.

그러자 그 자매가 하는 말이 가관입니다.

- 신부님, 신부님이 그렇게 가르치셨잖아요. 저희는 배운 대로 하고 있을 뿐이에요. 고마워하실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저희가 이렇게 신부님을 돌볼 수 있다는 게 큰 기쁨인걸요. 저희가 도리어 감사해요.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나 아프면 저희에게 말씀해 주세요. 하다못해 우는 얼굴의 문자[ ;( ]라고 한통 보내주세요. 그러면 저희가 도와드릴께요.

좋은 음식과 술이 있을 때에는 먼거리를 마다하고 기꺼이 달려오던 사람들은 정작 제가 아플 때에는 다가오기를 꺼려했습니다. 행여나 성가신 일을 떠맡을까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하지만 이 자매들은 제가 가장 힘들 때에 제 곁을 지켜 주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기도 안에서 기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자매들은 내세에서 반드시 그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갈라진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사랑이라는 것은 제가 배운 바에 따르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친구를 위해서 아낌없이 목숨을 내어 바치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근본이지요. 제가 열심히 가르친 보람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체험하였지요.

첫째는 꼴지가 되고, 반대로 꼴찌는 첫째가 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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