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루카 9,26)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주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모습이겠지요. 주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면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헌데 실제로 이런 일들은 일어납니다. 구체적인 몇 가지 예를 들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어느 공동체에 모임을 할 때에 힘있는 이들, 유명한 이들에게 다가서고 싶어하면서 반대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누추하거나 부족한 이들,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이들을 꺼려해 본 적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부끄럽게 여긴 행동이 됩니다.
외출할 때에 옷을 고르면서 이미 충분히 단정하고 깨끗한 옷이 있는데도 유명 상표의 옷이 없어서 실망스러운 마음을 지녔다면 그것은 주님을 부끄럽게 여기는 행동이 됩니다.
세속적인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온갖 세속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즐기면서 그들에게 자신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나 진실한 삶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신앙에로의 초대를 꺼린 적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부끄럽게 여긴 행동이 됩니다.
공공 장소에서 식사를 하면서 성호를 남들이 볼까 몰래 긋거나 기도하는 행위 자체를 수치스럽게 생각했다면 그것은 주님을 부끄럽게 여긴 행동이 됩니다.
멀리 휴가지에 가서 어디 새로운 곳을 찾아갈까 고심은 하면서 주일이 되어 미사를 드릴 성당을 찾을 시도는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님을 부끄럽게 여긴 행동이 됩니다.
이정도 하면 감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케이스에 주님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주저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부끄럽게 여기면 그분도 우리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신앙의 증거는 위대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작고 소소한 데에서 우리 신앙의 증거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주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모습이겠지요. 주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면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헌데 실제로 이런 일들은 일어납니다. 구체적인 몇 가지 예를 들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어느 공동체에 모임을 할 때에 힘있는 이들, 유명한 이들에게 다가서고 싶어하면서 반대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누추하거나 부족한 이들,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이들을 꺼려해 본 적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부끄럽게 여긴 행동이 됩니다.
외출할 때에 옷을 고르면서 이미 충분히 단정하고 깨끗한 옷이 있는데도 유명 상표의 옷이 없어서 실망스러운 마음을 지녔다면 그것은 주님을 부끄럽게 여기는 행동이 됩니다.
세속적인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온갖 세속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즐기면서 그들에게 자신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나 진실한 삶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신앙에로의 초대를 꺼린 적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부끄럽게 여긴 행동이 됩니다.
공공 장소에서 식사를 하면서 성호를 남들이 볼까 몰래 긋거나 기도하는 행위 자체를 수치스럽게 생각했다면 그것은 주님을 부끄럽게 여긴 행동이 됩니다.
멀리 휴가지에 가서 어디 새로운 곳을 찾아갈까 고심은 하면서 주일이 되어 미사를 드릴 성당을 찾을 시도는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님을 부끄럽게 여긴 행동이 됩니다.
이정도 하면 감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케이스에 주님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주저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부끄럽게 여기면 그분도 우리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신앙의 증거는 위대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작고 소소한 데에서 우리 신앙의 증거가 드러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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