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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상관있는 일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요한 21,22)

우리와 상관있는 일들이 있고 우리와 상관이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와 상관있는 일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과업은 우리가 평생을 다해도 온전히 이루지 못할 일입니다. 헌데 우리는 이것에 신경쓰기는 커녕 엉뚱한 호기심을 채우려고 듭니다.

여러분은 지금 열렬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그것이 하느님의 계명이라는 것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하느님을 잊고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는 커녕 씹어 삼키질 못해서 아우성입니다. 이런 죄많은 우리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주변에 시선을 돌립니다. 그리고 도끼눈을 뜨고 그것들을 바라보기가 일쑤이지요.

만일 그 시선을 우리 안으로 돌려본다면 우리의 영적 발전은 엄청날 것입니다. 나는 나의 아주 미미한 생각과 행동까지도 분별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며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을 향해서 이끌어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를 기억하십시오. 봉쇄 수도원에 갇혀 살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다이나믹한 삶을 사신 분이시고 하느님의 사랑의 열정에 가득 차 계셨던 분이십니다. 그리고 단명하셨지요.

우리가 신경써야 할 것은 지금 세상이 신경쓰고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만일 그 가운데 내 앞에 이러 저러한 과업이 주어진다면 마땅히 그것을 해야 하지요.

여기서 주의할 점은, ‘나 자신에게 신경쓰기’라는 말이 나 자신 안으로 몰입하여 그 안에 갇히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흔히들 분류하는 기도의 단계마냥 최고의 기도는 관상기도라면서 마치 자신을 사막의 은수자로 간주하는 식의 고립은 영성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내공을 지니고 그렇게 되어야 하지요. 짠 맛도 없으면서 자신을 세상의 소금인양 내어놓고 빛도 없으면서 자신을 빛으로 내세우다가는 엉뚱한 영혼들을 파멸로 이끌기가 일쑤입니다.

가까이에서 시작하십시오. 나 자신과 내 주변의 이웃에서부터 시작하십시오. 먼저 하느님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그 관계를 바탕으로 가까이 있는 이웃의 손을 잡아주는 일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그것이 영성생활입니다. 영성생활은 어느 성당 성체 조배실에 들어가서 몇시간동안 버티고 있으면서 나와서는 우쭐대며 자신은 그런 기도생활을 한다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웃을 깔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한 겸손으로 내 주변의 이웃들을 바라보고 그들을 사랑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나와 상관있는 일을 찾아 보십시오. 참으로 많은 일이 준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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