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본당의 한 자매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문자로 이런 저런 대화를 잠시 주고 받았습니다. 저로서는 조금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자매는 자신의 어떤 목적을 위해서 저를 사용하려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그게 뻔히 보이는 일이었지만 모르는 척하고 마지막에는 축복을 해 주었습니다.
사제는 공동체를 위해 파견되고 공동체를 위해서 쓰여집니다. 하지만 그렇게 쓰여지는 목적은 그 공동체가 사제직을 통해서 변화되어 가고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라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변화되지 않고 사제직을 사용해 오기만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공동체의 복음화에 헌신해 온 사제로서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 알고도 속아주기 시작합니다. 저는 씨를 심을 뿐이고 추수하시는 분은 하느님이 되셔야 합니다. 저는 쓰여져야 하고 죽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뜻 안에서 그리 하려고 합니다. 앞으로도 복음화는 계속될 것이고 저는 사람들에 의해 열심히 쓰여질 것입니다. 1000번을 쓰여져서 한 명이 복음의 가치를 알게 된다면 그것도 보람있는 일이겠지요. 인간적인 ‘효율성’의 면에서는 형편없는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앞으로 제 남은 생애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지금은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선교 공동체에 있으니 이런 저런 사연들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이제 한국에 돌아가면 그마저도 불가능하겠지요. 사람들은 너도나도 페이스북을 할 테고 저는 원론적인 이야기나 올릴 수 있게 될 뿐,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은 절대로 나누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 좁은 동네에 소문이 퍼지만 누군지 금방 알게 될 테니까요. 아마 그때에는 SNS를 통해서 스페인어로 볼리비아 공동체를 사목하려나요? 모를 일이지요.
사람들이 저를 쓰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좀 더 복음화가 되도록 쓰여지게 저를 추스리려고 합니다. 미사에 헌신할 것이며 고해성사를 주는 데에 주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남는 기회를 통해서 사람들을 열심히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사제는 공동체를 위해 파견되고 공동체를 위해서 쓰여집니다. 하지만 그렇게 쓰여지는 목적은 그 공동체가 사제직을 통해서 변화되어 가고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라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변화되지 않고 사제직을 사용해 오기만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공동체의 복음화에 헌신해 온 사제로서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 알고도 속아주기 시작합니다. 저는 씨를 심을 뿐이고 추수하시는 분은 하느님이 되셔야 합니다. 저는 쓰여져야 하고 죽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뜻 안에서 그리 하려고 합니다. 앞으로도 복음화는 계속될 것이고 저는 사람들에 의해 열심히 쓰여질 것입니다. 1000번을 쓰여져서 한 명이 복음의 가치를 알게 된다면 그것도 보람있는 일이겠지요. 인간적인 ‘효율성’의 면에서는 형편없는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앞으로 제 남은 생애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지금은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선교 공동체에 있으니 이런 저런 사연들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이제 한국에 돌아가면 그마저도 불가능하겠지요. 사람들은 너도나도 페이스북을 할 테고 저는 원론적인 이야기나 올릴 수 있게 될 뿐,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은 절대로 나누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 좁은 동네에 소문이 퍼지만 누군지 금방 알게 될 테니까요. 아마 그때에는 SNS를 통해서 스페인어로 볼리비아 공동체를 사목하려나요? 모를 일이지요.
사람들이 저를 쓰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좀 더 복음화가 되도록 쓰여지게 저를 추스리려고 합니다. 미사에 헌신할 것이며 고해성사를 주는 데에 주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남는 기회를 통해서 사람들을 열심히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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