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요한 16,23)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합니다. 제가 천억원 벌게 해 주세요.”라고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말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해야 하지요. 그분의 이름이라는 것은 고귀한 이름입니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나라에 대한 충정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고, 싸이의 이름을 쓰는 것은 인기있는 대중가수를 지칭하기 위한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은 그에 합당한 지위가 있습니다.
꼬마 아이에게 자동차를 준다고 그 아이가 차를 운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운전을 배워야 하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이름이 갖는 가치를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의 이름을 합당하게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인류를 위해서 드러내신 하느님의 가장 존귀한 사랑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은 모든 이에게 열려있는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모시고 다닐 수 있는 기회는 모든 이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은 다음의 조건을 지닌 이에게 해당됩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라야 하지요.
예수님의 이름만 써먹으려고 하고, 정작 그분의 말씀에 귀를 닫고 있다면 그건 사과를 본 적도 없으면서 사과에 대해서 떠드는 사람과 같습니다. 나아가 그분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실천하지 않으면서 그분의 이름을 거들먹거린다면 그것은 사과를 보긴 했지만 먹어보지도 않고 그 맛을 논하는 이와 같습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라면 누구나 예수님의 이름을 지니고 다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핵심적인 이유이지요. 하지만 그분의 이름만 지닌 채로 여전히 세상의 자녀로 살아가는 이들이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합니다. 제가 천억원 벌게 해 주세요.”라고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말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해야 하지요. 그분의 이름이라는 것은 고귀한 이름입니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나라에 대한 충정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고, 싸이의 이름을 쓰는 것은 인기있는 대중가수를 지칭하기 위한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은 그에 합당한 지위가 있습니다.
꼬마 아이에게 자동차를 준다고 그 아이가 차를 운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운전을 배워야 하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이름이 갖는 가치를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의 이름을 합당하게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인류를 위해서 드러내신 하느님의 가장 존귀한 사랑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은 모든 이에게 열려있는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모시고 다닐 수 있는 기회는 모든 이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은 다음의 조건을 지닌 이에게 해당됩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라야 하지요.
예수님의 이름만 써먹으려고 하고, 정작 그분의 말씀에 귀를 닫고 있다면 그건 사과를 본 적도 없으면서 사과에 대해서 떠드는 사람과 같습니다. 나아가 그분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실천하지 않으면서 그분의 이름을 거들먹거린다면 그것은 사과를 보긴 했지만 먹어보지도 않고 그 맛을 논하는 이와 같습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라면 누구나 예수님의 이름을 지니고 다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핵심적인 이유이지요. 하지만 그분의 이름만 지닌 채로 여전히 세상의 자녀로 살아가는 이들이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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