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의 공동체의 대표가 부족함을 지니고 있을 때에 과연 여러분은 어떻게 대처할 것입니까? 아니, 그 전에 하나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완벽한 대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자, 그럼 그의 부족함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그를 내쫓을 수 있습니다. 거세게 항의해서 그의 오류를 낱낱이 지적하고 그를 공동체에서 축출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보다 나아 보이는 다른 누군가를 대표자의 자리에 앉힐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방향으로 그를 향한 따뜻한 마음을 품고 그의 부족함을 조언하고 그가 그것을 개선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오류를 통해서 배워나갈 것이며 자신의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나날이 더 지혜로워지겠지요.
하지만 이 둘은 서로 극단적인 이상향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형태의 모습이 존재하며 그가 싫어서 쫓아내려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있고, 그의 부족함을 사랑으로 고치려 해도 그가 듣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이를 공동체의 대표로 둔 이들의 내면에는 결국 나날이 앙심이 생겨나고 또 공동체 구성원들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전혀 모르고 있던 이들에게까지 그러한 말들이 전파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결국 최종적인 단계로 둘은 서로의 힘겨루기를 하지요. 대표는 대표의 권한으로 공동체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단합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힘이 더 센 자가 승리합니다.
사실 교회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더한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공동체는 자신의 대표를 통상적으로 선출하는 과정을 거치지만 교회는 전혀 그런 과정 없이 대표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느 주임 사제도 ‘선출된’ 사제는 없습니다. 교구 직권자의 파견을 받아 그가 좋건 싫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요.
세상적으로 보면 답답하지 않은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첨단 과학의 시대에 전제 군주적인 중앙 집권화 체제를 유지하는 듯 보이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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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우리는 생각을 더 깊이 해야 합니다. 과연 교회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전부일까요? 교회는 그렇게 제도화되고 격식화되고 형식화된 모습이 전부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공동체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성령으로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각 구성원은 ‘신앙’으로 하느님의 성령과 하나되어 있지요. 그리고 하느님은 교회에 그런 오류와 난점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인지하고 계십니다.
바로 여기에 세상 공동체와의 차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하나된 공동체라는 것이 핵심이지요. 하느님의 백성인 것이고 그리스도의 지체인 것입니다.
결국 교회의 최고 통치자는 인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즉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지요. 하느님께서 교회를 돌보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우리가 간절히 비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이미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전능하신 팔을 움직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우리에게 금방 닥치지는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당신의 전능으로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시는데 그분이 때로는 가만히 계십니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의미’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밀과 가라지는 함께 자랍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 결과물을 드러낼 때에 그 둘은 추수될 것입니다. 못난 장상이나 그에 못된 마음을 먹는 지체나 모두 가라지가 될 수도, 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때를 기다리시는 것이지요. 그 공동체에 시련을 허락하시고 각자의 구성원이 내면에 사랑을 키우도록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부족한 장상은 늘 존재합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예수님 뿐입니다. 교회에 부족한 장상이 다가왔을 때에 우리는 저마다 그 장상을 원하는 대로 대하게 됩니다. 모쪼록 애정과 사랑을 꺼낼 수 있는 구성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를 내쫓을 수 있습니다. 거세게 항의해서 그의 오류를 낱낱이 지적하고 그를 공동체에서 축출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보다 나아 보이는 다른 누군가를 대표자의 자리에 앉힐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방향으로 그를 향한 따뜻한 마음을 품고 그의 부족함을 조언하고 그가 그것을 개선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오류를 통해서 배워나갈 것이며 자신의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나날이 더 지혜로워지겠지요.
하지만 이 둘은 서로 극단적인 이상향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형태의 모습이 존재하며 그가 싫어서 쫓아내려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있고, 그의 부족함을 사랑으로 고치려 해도 그가 듣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이를 공동체의 대표로 둔 이들의 내면에는 결국 나날이 앙심이 생겨나고 또 공동체 구성원들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전혀 모르고 있던 이들에게까지 그러한 말들이 전파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결국 최종적인 단계로 둘은 서로의 힘겨루기를 하지요. 대표는 대표의 권한으로 공동체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단합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힘이 더 센 자가 승리합니다.
사실 교회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더한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공동체는 자신의 대표를 통상적으로 선출하는 과정을 거치지만 교회는 전혀 그런 과정 없이 대표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느 주임 사제도 ‘선출된’ 사제는 없습니다. 교구 직권자의 파견을 받아 그가 좋건 싫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요.
세상적으로 보면 답답하지 않은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첨단 과학의 시대에 전제 군주적인 중앙 집권화 체제를 유지하는 듯 보이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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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우리는 생각을 더 깊이 해야 합니다. 과연 교회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전부일까요? 교회는 그렇게 제도화되고 격식화되고 형식화된 모습이 전부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공동체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성령으로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각 구성원은 ‘신앙’으로 하느님의 성령과 하나되어 있지요. 그리고 하느님은 교회에 그런 오류와 난점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인지하고 계십니다.
바로 여기에 세상 공동체와의 차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하나된 공동체라는 것이 핵심이지요. 하느님의 백성인 것이고 그리스도의 지체인 것입니다.
결국 교회의 최고 통치자는 인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즉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지요. 하느님께서 교회를 돌보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우리가 간절히 비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이미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전능하신 팔을 움직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우리에게 금방 닥치지는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당신의 전능으로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시는데 그분이 때로는 가만히 계십니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의미’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밀과 가라지는 함께 자랍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 결과물을 드러낼 때에 그 둘은 추수될 것입니다. 못난 장상이나 그에 못된 마음을 먹는 지체나 모두 가라지가 될 수도, 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때를 기다리시는 것이지요. 그 공동체에 시련을 허락하시고 각자의 구성원이 내면에 사랑을 키우도록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부족한 장상은 늘 존재합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예수님 뿐입니다. 교회에 부족한 장상이 다가왔을 때에 우리는 저마다 그 장상을 원하는 대로 대하게 됩니다. 모쪼록 애정과 사랑을 꺼낼 수 있는 구성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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