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과한 자존감

의외로 저는 부유한 동네에 머물 기회가 좀 있었습니다. 물론 서울의 엄청난 곳이라던가 미국의 어마어마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한국에서 값나가는 동네였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좀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장’이나 ‘사’자를 끝마무리에 다는 직분을 지닌 분들이었지요. 원장, 관장, 사장, 박사, 의사, 변호사... 참으로 교양있는 분들이었습니다. 어느 고급 레스토랑에 가던지 식기를 순서대로 쓸 줄 아는 분들 같아 보였지요. 하지만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자존감’

저마다 자존감이 엄청나게 강한 분들이었습니다. 지니고 있는 상식과 교양 때문에 엄청 참고 있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붉은 피가 흐르는 심장을 휴지로 아무리 감싸봐야 결국에는 그 피가 배어나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모두 자존감이 엄청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이 지닌 직분에 대해서 엄청난 자존감을 지니고 있었고, 그 자존감은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 다른 모든 것에도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그 자존감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말에 집중하기를 바랬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상당히 기분을 상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자신이 겪어온 인생 여정에 대해서 얼마나 반복했을는지 모를 정도로 말만 시작하면 준비된 대사가 좌르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든 결론은 언제나 동일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다.’라는 것이었지요. 거의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들이 말을 시작하면 언제나 귀결은 똑같았습니다. 행여 모임 안에 그런 사람들이 몇 명 있으면 아주 굉장히 시끄러워집니다. 저마다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고 말을 하기는 하는데 듣는 사람은 없어 보였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성당 안’이라는 것이었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사제의 권위에는 그나마 ‘외적 존경’을 보였습니다. 아마 그것이 성당 안에서 합의된 교양이니 그렇겠지요. 외적 존경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 최종 권력자 사제가 없는 곳에서 어떤 말들을 나누는지 들어볼 기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만 해도 저는 ‘보좌’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들은 사실 그 어떤 권위에도 존경을 내비치지 않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런 이들이 밖에서 만난다면 그 가운데 끼인 아무런 직분이 없는 사람은 얼마나 피곤할까 싶었습니다.

물론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진정 신심있는 분들도 있었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분들도 있었지요. 그런 분들은 겸손을 타고난 분들 같았습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숫자에게서 비슷한 모양을 보았습니다. 저마다 자신을 최고로 내세우는 이들이었지요.

자존감은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지탱하는 생각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하지요. 하지만 간혹 도를 넘는 자존감은 오히려 자기 스스로를 무너뜨리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허영과 교만이라고도 하지요. 자존감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한계를 올바로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하느님 앞에서 사랑받는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감싸 안을 때에 표현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