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은 행복에 대한 새로운 개념정립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곧잘 행복과 쾌락을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쾌락이라는 것은 우리의 육신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이라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느끼는 것입니다. 쾌락을 느끼면 인간은 행복하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쾌락 중에도 불행한 영혼이 존재합니다. 반대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내면 깊은 곳에는 행복을 간직한 영혼도 있지요.
과연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행복이라는 것은 인간이 참된 본연의 자신의 모습을 회복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반대로 인간이 불행해지는 것은 자신이 아닌 것이 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고, 자신에게 소용이 없는 것을 추구하려고 애쓰기 때문입니다.
새들은 새들 그대로 행복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에 순응합니다. 먹이가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고 그럼에도 새로운 날이 밝으면 다시 노래를 부르면서 먹이를 찾아 다닙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정한 때가 되어 더 큰 짐승에게 먹히는 시기가 되면 그렇게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것이지요.
인간이 행복할 때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할 때입니다. 헌데 그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인간은 언제 자신의 모습을 진정으로 회복할 수 있을까요? 바로 여기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의견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누군가는 학업이야말로 인간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최고의 수단이라고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세상 안에서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건강과 미모와 같은 육체적인 완성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고, 명예로움을 최고의 인간의 완성으로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헌데 이 모든 내용들 가운데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오직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본연의 자신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고려치 않은 인간 존재는 아무리 자신이 뛰어나다 해도 미흡할 뿐입니다. 결국 죽음이 찾아들고 나면 먼지로 돌아가는 존재에 불과하지요.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찾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행복은 오직 하느님 앞에 자신의 본연의 자리를 회복한 사람에게 하느님이 쏟아주시는 큰 사랑 안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 자리를 벗어나서 아무리 뛰어난 존재가 되려고 노력한다 해도 소용 없습니다. 모든 진실과 선과 사랑과 참된 행복은 오직 하느님에게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많이 소유함’을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많이 체험함’을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이들 앞에서 봉쇄 수도원의 수도자는 어리석음의 극치일 뿐이고 겉으로는 존경을 표하지만 속으로는 ‘절대 나는 저렇게 살지 않을거야’라고 그들의 삶에 반감을 드러내는 것이 보통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그러한 것에 두는 이들, 즉 많은 소유와 많은 체험을 행복의 가치로 여기는 이들은 그것을 드러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실은 그들은 소유와 체험 자체로 누리는 행복보다도 그것을 과시함으로써 얻는 행복을 더욱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정말 필요해서 가지는 이는 그것을 사용하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소유와 체험에 집착하는 이는 그것을 타인에게 과시해서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데에 여념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정작 본인만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요. 모쪼록 여러분들은 하느님 앞에서의 본연의 위치를 회복해서 진정으로 행복한 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과연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행복이라는 것은 인간이 참된 본연의 자신의 모습을 회복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반대로 인간이 불행해지는 것은 자신이 아닌 것이 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고, 자신에게 소용이 없는 것을 추구하려고 애쓰기 때문입니다.
새들은 새들 그대로 행복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에 순응합니다. 먹이가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고 그럼에도 새로운 날이 밝으면 다시 노래를 부르면서 먹이를 찾아 다닙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정한 때가 되어 더 큰 짐승에게 먹히는 시기가 되면 그렇게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것이지요.
인간이 행복할 때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할 때입니다. 헌데 그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인간은 언제 자신의 모습을 진정으로 회복할 수 있을까요? 바로 여기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의견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누군가는 학업이야말로 인간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최고의 수단이라고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세상 안에서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건강과 미모와 같은 육체적인 완성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고, 명예로움을 최고의 인간의 완성으로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헌데 이 모든 내용들 가운데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오직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본연의 자신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고려치 않은 인간 존재는 아무리 자신이 뛰어나다 해도 미흡할 뿐입니다. 결국 죽음이 찾아들고 나면 먼지로 돌아가는 존재에 불과하지요.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찾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행복은 오직 하느님 앞에 자신의 본연의 자리를 회복한 사람에게 하느님이 쏟아주시는 큰 사랑 안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 자리를 벗어나서 아무리 뛰어난 존재가 되려고 노력한다 해도 소용 없습니다. 모든 진실과 선과 사랑과 참된 행복은 오직 하느님에게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많이 소유함’을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많이 체험함’을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이들 앞에서 봉쇄 수도원의 수도자는 어리석음의 극치일 뿐이고 겉으로는 존경을 표하지만 속으로는 ‘절대 나는 저렇게 살지 않을거야’라고 그들의 삶에 반감을 드러내는 것이 보통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그러한 것에 두는 이들, 즉 많은 소유와 많은 체험을 행복의 가치로 여기는 이들은 그것을 드러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실은 그들은 소유와 체험 자체로 누리는 행복보다도 그것을 과시함으로써 얻는 행복을 더욱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정말 필요해서 가지는 이는 그것을 사용하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소유와 체험에 집착하는 이는 그것을 타인에게 과시해서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데에 여념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정작 본인만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요. 모쪼록 여러분들은 하느님 앞에서의 본연의 위치를 회복해서 진정으로 행복한 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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