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을 지키는 것이 제물을 많이 바치는 것이고, 계명에 충실한 것이 구원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은혜를 갚는 것이 고운 곡식 제물을 바치는 것이고, 자선을 베푸는 것이 찬미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악을 멀리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고, 불의를 멀리하는 것이 속죄하는 것이다. (집회 35,1-5)
이렇게 훌륭하게 정돈된 내용은 다른 곳에서 찾기 힘듭니다. 진정한 하느님을 향해 드리는 제사와 예물, 그리고 우리의 참된 속죄에 대한 내용을 훌륭하게 요약해 놓았습니다.
사실 사람의 마음이 올바르면 거기에서 절로 모든 좋은 것들이 나오게 됩니다. 교무금을 억지로 책정을 하고 봉헌금을 많이 내라고 말하기 전에 그들에게 하느님을 향한 충분한 감사의 마음을 체험하게 하면 사람들은 절로 자신이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기 시작하고 교회의 필요를 보살필 것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괴로워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은 바뀌지 않으면서 마음이 바뀌어서 얻어지는 결과물은 얻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여전히 선하지 않은데 내가 선하게 되어서 얻어낼 수 있는 결과물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즉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기를 바라지요. 그래서 우리는 다른 방법을 씁니다.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꾸미게 만드는 것이지요. 나를 선하게 바꾸지는 않은 채로 그들의 구미에 맞는 것을 갖추어 그들이 나를 사랑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돈’이지요. 많은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니까요. 하지만 그건 큰 착각입니다. 그들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결국 내가 가진 돈을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헌데 교회 안에서는 이것이 좀 더 미묘하게 적용이 됩니다. 돈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 돈처럼 작용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염경 기도의 횟수를 많이 하는 사람’, ‘신심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수료증을 받는 것’, ‘평일미사에 자주 참례하는 사람’, ‘고위 공직자와 친분을 과시하는 사람’, ‘교회 안의 터줏대감’, ‘교회의 중요 직분들’과 같은 모든 것이 마치 세상의 돈처럼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해병대마냥 차수를 따져가면서 특정 신심 프로그램끼리의 모임을 결성하고, 온갖 강연회와 세미나를 쫓아다니면서 수료증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하는 것으로 자신의 신심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내면에는 신심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과시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것으로 내적인 것을 포장하려는 사람들, 예수님은 그들을 두고 ‘회칠한 무덤’과 같은 존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속에는 썩은 시체를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아주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무덤을 지니고 있는 자들입니다. 행여 지나다니다가 그런 자들을 밟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자신의 회칠이 떨어져나가는 걸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내면에 들어있는 시체를 죽어도 들키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미 모든 것을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을 그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훌륭하게 정돈된 내용은 다른 곳에서 찾기 힘듭니다. 진정한 하느님을 향해 드리는 제사와 예물, 그리고 우리의 참된 속죄에 대한 내용을 훌륭하게 요약해 놓았습니다.
사실 사람의 마음이 올바르면 거기에서 절로 모든 좋은 것들이 나오게 됩니다. 교무금을 억지로 책정을 하고 봉헌금을 많이 내라고 말하기 전에 그들에게 하느님을 향한 충분한 감사의 마음을 체험하게 하면 사람들은 절로 자신이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기 시작하고 교회의 필요를 보살필 것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괴로워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은 바뀌지 않으면서 마음이 바뀌어서 얻어지는 결과물은 얻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여전히 선하지 않은데 내가 선하게 되어서 얻어낼 수 있는 결과물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즉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기를 바라지요. 그래서 우리는 다른 방법을 씁니다.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꾸미게 만드는 것이지요. 나를 선하게 바꾸지는 않은 채로 그들의 구미에 맞는 것을 갖추어 그들이 나를 사랑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돈’이지요. 많은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니까요. 하지만 그건 큰 착각입니다. 그들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결국 내가 가진 돈을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헌데 교회 안에서는 이것이 좀 더 미묘하게 적용이 됩니다. 돈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 돈처럼 작용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염경 기도의 횟수를 많이 하는 사람’, ‘신심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수료증을 받는 것’, ‘평일미사에 자주 참례하는 사람’, ‘고위 공직자와 친분을 과시하는 사람’, ‘교회 안의 터줏대감’, ‘교회의 중요 직분들’과 같은 모든 것이 마치 세상의 돈처럼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해병대마냥 차수를 따져가면서 특정 신심 프로그램끼리의 모임을 결성하고, 온갖 강연회와 세미나를 쫓아다니면서 수료증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하는 것으로 자신의 신심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내면에는 신심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과시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것으로 내적인 것을 포장하려는 사람들, 예수님은 그들을 두고 ‘회칠한 무덤’과 같은 존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속에는 썩은 시체를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아주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무덤을 지니고 있는 자들입니다. 행여 지나다니다가 그런 자들을 밟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자신의 회칠이 떨어져나가는 걸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내면에 들어있는 시체를 죽어도 들키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미 모든 것을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을 그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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