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받는 이들은 사실 널리고 널렸습니다. 고통은 우리 삶의 피할 수 없는 동반자입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전능하지 못하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없습니다. 헌데 우리의 원의는 도무지 꺼질 줄을 모르지요. 그래서 인간은 고통당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고통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저마다의 고통을 감수하고 살아갈 뿐이지요.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남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행복한 순간을 바라보고 부러워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웃고 있는 사람들도 힘들어 할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의 웃는 모습을 바라볼 뿐입니다. 돈을 엄청 지니고 있던 대기업 회장도 자살을 하고, 우리에게 삶의 희망을 심어주던 유명 배우도 자살을 하고,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이들도 자살을 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그들을 채워주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행복은 고통을 절제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고통을 극복하는 데에 있습니다. 고통은 어떤 이유로든지 끊임없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기에게는 일어서는 것이 고통이지만 일단 일어서고 나면 달리는 것이 새로운 고통이 되고 일어서기 위해서 노력하던 시간들은 잊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들에서 우리가 자유로워지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금의 고통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처음 기타를 잡으면 손에 굳은살이 배이기 까지 꽤나 고생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일단 굳은살이 박히고 나면 예전의 고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시련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련은 단순히 육적 고통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고통의 과정에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자꾸만 회피하려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힘드니까 일단은 도망치고 보려는 이들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머지않아 다시 같은 종류의 고통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고통은 더욱 가중되게 마련이지요. 피한 만큼 우리는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 셈입니다. 극복할 수 있는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지요. 그러면 훗날 그 고통이 다시 돌아올 때에 나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하느님은 우리가 무너질 고통을 지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어머니가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은 아이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아이가 그 고통을 극복하고 나서 얻게 될 것을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역시도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고통의 순간에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느님이 응답하지 않는 이유는 하느님이 뭔가 다른 방향의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우리가 그 고통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고통은 신비입니다. 우리에게 가리워져 있지요. 그러나 하느님은 알고 계십니다. 지금의 이 고통이 왜 일어나는지 말이지요. 그러니 그분을 신뢰하고 눈 앞의 고통을 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이 고통에는 다른 별명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십자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남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행복한 순간을 바라보고 부러워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웃고 있는 사람들도 힘들어 할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의 웃는 모습을 바라볼 뿐입니다. 돈을 엄청 지니고 있던 대기업 회장도 자살을 하고, 우리에게 삶의 희망을 심어주던 유명 배우도 자살을 하고,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이들도 자살을 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그들을 채워주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행복은 고통을 절제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고통을 극복하는 데에 있습니다. 고통은 어떤 이유로든지 끊임없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기에게는 일어서는 것이 고통이지만 일단 일어서고 나면 달리는 것이 새로운 고통이 되고 일어서기 위해서 노력하던 시간들은 잊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들에서 우리가 자유로워지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금의 고통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처음 기타를 잡으면 손에 굳은살이 배이기 까지 꽤나 고생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일단 굳은살이 박히고 나면 예전의 고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시련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련은 단순히 육적 고통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고통의 과정에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자꾸만 회피하려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힘드니까 일단은 도망치고 보려는 이들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머지않아 다시 같은 종류의 고통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고통은 더욱 가중되게 마련이지요. 피한 만큼 우리는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 셈입니다. 극복할 수 있는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지요. 그러면 훗날 그 고통이 다시 돌아올 때에 나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하느님은 우리가 무너질 고통을 지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어머니가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은 아이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아이가 그 고통을 극복하고 나서 얻게 될 것을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역시도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고통의 순간에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느님이 응답하지 않는 이유는 하느님이 뭔가 다른 방향의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우리가 그 고통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고통은 신비입니다. 우리에게 가리워져 있지요. 그러나 하느님은 알고 계십니다. 지금의 이 고통이 왜 일어나는지 말이지요. 그러니 그분을 신뢰하고 눈 앞의 고통을 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이 고통에는 다른 별명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십자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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