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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를 맺는 이들

쉬운 길을 선택하고 싶어 안달이 난 학생들이 있습니다. 시험이 다가오면 컨닝을 하고 싶어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 가운데 한 학생이 나서서 ‘컨닝하는 것은 사실 정당한 것이다. 공부를 많이 한 학생들은 지나치게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나눌 필요가 있다!’ 물론 말도 안되는 주장이지만 이런 주장을 하면서 학생들을 선동해서 서로 컨닝을 하게 만든다면 거기에 기꺼이 동조하는 학생들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안 자체가 옳아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이 그것을 이미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별이라는 주제에 있어서 흔히 이런 식으로 분별을 하고 맙니다. 우리는 우리의 체험을 바탕으로 속상한 일을 우선적으로 해결하는 데에 먼저 마음을 둡니다. 그래서 나주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주는 눈에 보이는 신앙을 갈구하던 이들의 욕구를 멋지게 해소시켜 주었고 거기에 더해서 사제들 욕을 실컷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피흘리는 성모상을 보이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성체를 보여주고, 입안 가득 피가 고여 마치 성변화가 실제의 살과 피로 일어난 것 같은 쇼를 하면서 먼저 그런 종류의 헛된 기적들을 갈망하는 이들의 마음을 쾌락으로 가득 채웠고, 나아가서 기성 교회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신자들은 기성 교회의 오류에 지쳐 있었고 그래서 거기에 동조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과연 우리의 분별은 무엇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할까요? 그것은 당연히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입니다. 헌데 과연 누가 성령을 지니고 있습니까? 그가 진짜배기인지 가짜배기인지 과연 우리는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미 그에 대해서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을 아시고 지침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간단합니다. 그가 맺는 ‘열매’로 그를 분별하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나올리가 없고,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나올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제 마지막 질문이 다가오게 됩니다. 무엇이 좋은 열매이고 무엇이 나쁜 열매입니까?

여기에서 사람들은 다시 제일 처음에 제가 언급한 상황으로 돌아갑니다. ‘저마다 제가 좋아하는 열매를 좋은 열매’로 생각해 버리고 맙니다. 즉, 시어머니에게 화가 난 사람은 시어머니를 욕하는 사람을 두고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착각을 하고, 핸드백이 사고 싶어 눈이 흐려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죽이고 핸드백을 훔쳐 자신에게 가져다주는 사람을 환영하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을 진탕 취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을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하는 식이지요.

결국 자신의 마음에 잔뜩 들어있는 욕구대로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이미 성경에는 올바른 지침이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갈라 5,22-23)

그리고 이에 반하는 육의 열매는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미 경고한 그대로 이제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갈라 5,19-21)

세상 사람들은 서로 싸우는 걸 어찌나 즐기는지 자신과 조금만 틀어지면 덤벼들어 집어 삼키려고 안달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의’로 포장하는 데에 선수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채찍질하는 로마 병사 앞에서 천상 군대를 데려와 그들을 산산조각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그 채찍질을 모조리 참아 견뎠습니다. 사람들의 침뱉음도, 모욕도, 조롱도, 뺨때림도 참아 견뎠습니다. 제자들이 뿔뿔이 제 살겠다고 도망가는데도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 여깄으니 나를 잡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사랑과 인내를 세상은 배우지 못합니다.

자신을 체포하러 온 이의 귀를 어루만져 고쳐주시는 호의와 선의,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신 성실, 밀려드는 군중에 지쳐 허덕이면서도 배고픔을 참고 다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하신 절제와 사랑,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그분의 주변에 가득했던 기쁨과 평화.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이 지니신 성령의 열매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반대하는 자들, 시기하는 자들이 존재할 것이고 우리를 공략하기 위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릴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속이는 자들이 주변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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