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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의로움, 심판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요한 16,8-11)

말마디 그대로 살펴 들어가 봅시다. 죄에 관해서 잘못 생각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시는 것은 반대로 그분을 믿으면 죄에 대해서 올바로 알 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즉, 그분을 올바로 믿으면 ‘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믿지 않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금육을 지키느냐 마느냐에서 사람들을 죄를 찾지만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 그분을 올바로 믿는 사람은 금육의 규정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아마 누군가는 따지듯이 물을 것입니다. ‘그럼 금육을 지키지 않아도 좋다는 말이냐?’ 그런 질문 자체로 이미 그는 죄에 대해서 잘못된 관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고, 아직 예수님의 마음에 대해서 합당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의로움을 잘못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에게 돌아가신 예수님을 뵙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외아들의 영광을 본다면 우리는 의로움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의로움이라는 것은 율법 규정을 철저히 지켜서 얻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함으로써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근본에 의로움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의로운 분을 통해서 의로움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진정한 의로움은 하느님만이 지니고 계시며 우리는 그분에게 가까이 다가섬으로써 그 의로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과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는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긋난 의로움이었지요. 참된 의로움은 예수님을 만나고 진정 하느님이 뜻에 따라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심판에 대해서 우리가 오해하는 것은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세상의 우두머리는 분명히 이미 심판을 받았고 따라서 세상의 우두머리를 따르는 모든 이들은 자연히 세상의 우두머리의 심판에 동참하는 꼴이 됩니다. 세상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좋은 것들을 하느님 앞에 두는 이들은 이미 그 심판에 동참하는 꼴이 되는 것이지요. 이는 분명한 어리석음인데도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심판에 참여하는 것이지요.

성령께서 오시면 이 모든 것을 밝혀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이들은 이를 분별해 낼 수 있지요. 그러나 자신이 마음을 열지 않는 이상 성령은 우리 내면에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전히 ‘죄의 종살이’를 하고 살아가지요.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의로움이고, 무엇이 심판인지 여전히 알지 못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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