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초적인 질문은 우리가 하느님을 지적으로 인식하는 순간부터 시작되어서 한동안 계속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지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은 결코 결론에 이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인간의 지성 만으로 인지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영역을 ‘신비’라고 표현합니다.
죄도 사랑도 모두 신비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대해 지적인 토론만으로는 결코 알아낼 수 없습니다. 한 인간은 자신의 죄를 떠나서, 자신의 사랑의 실천 없이도 얼마든지 지성으로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지에게 돈 한 푼 주지 않고서도 대학 강의실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널리고 널려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구체적인 체험으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체험에는 반드시 영적인 면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적인 면은 쉽게 묘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개인마다의 고유한 체험으로 간직하게 되는 것이지요.
단 한 번이라도 하느님의 맛을 본 사람은 영원히 그 맛을 잊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감미로우심과 그분의 거룩하심, 그 큰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자신의 영혼 속에 잊을 수 없는 자국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이들은 비록 잠시 엇나갈 순 있지만 결국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 하느님의 체험이 없는 이들, 모든 것을 자신의 생각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호와 선호도를 바탕으로 구축한 이들은 심지어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면서도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실 ‘사랑’ 자체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늘 ‘거래’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내가 얼마를 주고 얼마를 받는 것을 상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으면 절대로 투자를 하지 않는 이들이지요.
하느님이 계시냐구요? 사실 우스운 질문입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창조주가 계시지 않는데 물질 만으로 구성된 이 세상은 과연 무엇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며 그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러한 질문들, 의문들은 이성으로 토론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실제의 삶으로 여실히 드러나고 있으니까요.
제 아무리 하느님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라도 그들의 삶이 악하다면 그는 하느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해서 의문을 늘 품고 있지만 언제나 이웃을 따스하게 대하고 영원한 가치를 추구한다면 그는 이미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지요.
가톨릭 교회는 오랜 동안 지성의 시대를 거치면서 신학이 엄청나게 발전했습니다. 사실 지금에 와서는 생존하는 어느 누구도 도서관을 꽉꽉 채운 그 모든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다못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만 해도 엄청난 양이지요. 신앙은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은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이 살아계시는 분이시고 사랑이 가득한 분이시며 우리를 늘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죄도 사랑도 모두 신비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대해 지적인 토론만으로는 결코 알아낼 수 없습니다. 한 인간은 자신의 죄를 떠나서, 자신의 사랑의 실천 없이도 얼마든지 지성으로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지에게 돈 한 푼 주지 않고서도 대학 강의실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널리고 널려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구체적인 체험으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체험에는 반드시 영적인 면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적인 면은 쉽게 묘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개인마다의 고유한 체험으로 간직하게 되는 것이지요.
단 한 번이라도 하느님의 맛을 본 사람은 영원히 그 맛을 잊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감미로우심과 그분의 거룩하심, 그 큰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자신의 영혼 속에 잊을 수 없는 자국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이들은 비록 잠시 엇나갈 순 있지만 결국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 하느님의 체험이 없는 이들, 모든 것을 자신의 생각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호와 선호도를 바탕으로 구축한 이들은 심지어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면서도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실 ‘사랑’ 자체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늘 ‘거래’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내가 얼마를 주고 얼마를 받는 것을 상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으면 절대로 투자를 하지 않는 이들이지요.
하느님이 계시냐구요? 사실 우스운 질문입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창조주가 계시지 않는데 물질 만으로 구성된 이 세상은 과연 무엇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며 그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러한 질문들, 의문들은 이성으로 토론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실제의 삶으로 여실히 드러나고 있으니까요.
제 아무리 하느님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라도 그들의 삶이 악하다면 그는 하느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해서 의문을 늘 품고 있지만 언제나 이웃을 따스하게 대하고 영원한 가치를 추구한다면 그는 이미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지요.
가톨릭 교회는 오랜 동안 지성의 시대를 거치면서 신학이 엄청나게 발전했습니다. 사실 지금에 와서는 생존하는 어느 누구도 도서관을 꽉꽉 채운 그 모든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다못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만 해도 엄청난 양이지요. 신앙은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은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이 살아계시는 분이시고 사랑이 가득한 분이시며 우리를 늘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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