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마르 4,38)
시간이 흐르긴 했고 다른 사건들이 새로이 터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인터넷 상에서 뜨거운 감자인 사건은 단연코 ‘세월호’사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고한 아이들의 죽음과 정부의 무능한 대응 앞에서 사회는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사건은 그 순간만의 일이 아니라 정부를 향해서 쌓여온 사람들의 불신과 분노가 크게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수단은 대중매체의 흐름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뒤바꾸어 버렸습니다. 전에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정보를 손바닥 안에서 검색할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누구나 원하면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 덕에 은밀한 곳에서 진행되던 일들이 하나씩 둘씩 까발려지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 사람들의 전에 없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호 사건이 터진 거지요. 그 이전까지도 여러가지 정치권의 비리는 있었지만 그려러니 했었는데 이번에는 무죄한 아이들이 현장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는 정부를 보고 ‘이러다간 죽겠다’는 위기감을 느낀 셈입니다. 결국 배 안에 남아있던 아이들은 모두 죽어버렸고 사람들은 분노하고 행동하기 시작했지요.
사람들은 자신과 뜻을 같이 해줄 만한 대상을 물색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교회’가 있었습니다. 상처입은 사람들은 늘 사람들의 아픔을 보듬어준 교회의 그늘에 와서 힘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교회는 저마다의 구성원들의 역량대로 실천적인 면에서 사람들을 돕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모조리 다 들어줄 수는 없었습니다.
교회는 도대체 왜 존재하는 걸까요? 여기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의견 차이로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적극적으로 사회 일에 참여해서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우는 존재일까요? 아니면 골방에 틀어박혀 기도만 하는 사회와 분리된 존재일까요? 과연 이에 대해서 교회는 뭐라 대답해야 하는 걸까요? 아무래도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쳤습니다. 헌데 왜 고쳤을까요? 그리고 왜 그 당시의 모든 병자들이 혜택을 입지는 않은 걸까요? 수많은 소경들 중에 일부만이, 그리고 수많은 나병환자 중에 일부만이 혜택을 받은 걸까요? 왜 병원을 세워 지역 사람들이 안정적이고 꾸준한 치료를 받도록 하진 않으신 걸까요?
예수님은 빵의 기적을 일으켜 굶주린 이들을 먹였습니다. 헌데 왜 그러신 걸까요? 그리고 기왕이면 그 기적을 매일같이 행해서 아예 빵공장을 차리고 돈을 벌어 사람들의 가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생각을 하진 못한 걸까요?
제자들이 풍랑에 시달리고 죽음에 직면한 한시가 급한 위기 상황에서 예수님은 왜 당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이 주무시고 계셨던 걸까요?
무엇보다 당신 자신은 왜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맞서서 당신을 항변하고 상급 법원에 상소하고 자신의 권리를 지키지 않은 걸까요?
교회를 사회의 불의 앞에서 움직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그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도와주어야 하고 보듬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고통이 일시에 사라진다거나 그 어떤 고통도 없는 낙원이 지금의 이 현실에서 완벽하게 구축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불의한 제도와 권력 앞에서 바른 방향의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불의가 완벽하게 사라질 거라는 착각을 해서도 안됩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느님의 영원 안에 두어야 하고 우리의 시선은 눈 앞의 이웃인 고통받는 이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때로 교회에 분노하는 이유는 교회의 희망에 대해서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는 완벽하지 않고 구성원들 중에는 오류에 빠져 있는 이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한 이들 때문에 사람들은 실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바람은 교회를 통해서 완전히 채워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당신의 제자들이 풍랑에 시달려도 뱃머리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의 무관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회는 사람들에게 결코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고통을 앞에 두고 전능하신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묵주를 잡고 드리는 기도의 위력을 세상 사람들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무능하고 어리석은 이들로 비춰질 뿐이지요.
시간이 흐르긴 했고 다른 사건들이 새로이 터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인터넷 상에서 뜨거운 감자인 사건은 단연코 ‘세월호’사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고한 아이들의 죽음과 정부의 무능한 대응 앞에서 사회는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사건은 그 순간만의 일이 아니라 정부를 향해서 쌓여온 사람들의 불신과 분노가 크게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수단은 대중매체의 흐름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뒤바꾸어 버렸습니다. 전에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정보를 손바닥 안에서 검색할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누구나 원하면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 덕에 은밀한 곳에서 진행되던 일들이 하나씩 둘씩 까발려지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 사람들의 전에 없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호 사건이 터진 거지요. 그 이전까지도 여러가지 정치권의 비리는 있었지만 그려러니 했었는데 이번에는 무죄한 아이들이 현장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는 정부를 보고 ‘이러다간 죽겠다’는 위기감을 느낀 셈입니다. 결국 배 안에 남아있던 아이들은 모두 죽어버렸고 사람들은 분노하고 행동하기 시작했지요.
사람들은 자신과 뜻을 같이 해줄 만한 대상을 물색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교회’가 있었습니다. 상처입은 사람들은 늘 사람들의 아픔을 보듬어준 교회의 그늘에 와서 힘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교회는 저마다의 구성원들의 역량대로 실천적인 면에서 사람들을 돕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모조리 다 들어줄 수는 없었습니다.
교회는 도대체 왜 존재하는 걸까요? 여기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의견 차이로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적극적으로 사회 일에 참여해서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우는 존재일까요? 아니면 골방에 틀어박혀 기도만 하는 사회와 분리된 존재일까요? 과연 이에 대해서 교회는 뭐라 대답해야 하는 걸까요? 아무래도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쳤습니다. 헌데 왜 고쳤을까요? 그리고 왜 그 당시의 모든 병자들이 혜택을 입지는 않은 걸까요? 수많은 소경들 중에 일부만이, 그리고 수많은 나병환자 중에 일부만이 혜택을 받은 걸까요? 왜 병원을 세워 지역 사람들이 안정적이고 꾸준한 치료를 받도록 하진 않으신 걸까요?
예수님은 빵의 기적을 일으켜 굶주린 이들을 먹였습니다. 헌데 왜 그러신 걸까요? 그리고 기왕이면 그 기적을 매일같이 행해서 아예 빵공장을 차리고 돈을 벌어 사람들의 가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생각을 하진 못한 걸까요?
제자들이 풍랑에 시달리고 죽음에 직면한 한시가 급한 위기 상황에서 예수님은 왜 당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이 주무시고 계셨던 걸까요?
무엇보다 당신 자신은 왜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맞서서 당신을 항변하고 상급 법원에 상소하고 자신의 권리를 지키지 않은 걸까요?
교회를 사회의 불의 앞에서 움직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그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도와주어야 하고 보듬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고통이 일시에 사라진다거나 그 어떤 고통도 없는 낙원이 지금의 이 현실에서 완벽하게 구축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불의한 제도와 권력 앞에서 바른 방향의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불의가 완벽하게 사라질 거라는 착각을 해서도 안됩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느님의 영원 안에 두어야 하고 우리의 시선은 눈 앞의 이웃인 고통받는 이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때로 교회에 분노하는 이유는 교회의 희망에 대해서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는 완벽하지 않고 구성원들 중에는 오류에 빠져 있는 이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한 이들 때문에 사람들은 실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바람은 교회를 통해서 완전히 채워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당신의 제자들이 풍랑에 시달려도 뱃머리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의 무관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회는 사람들에게 결코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고통을 앞에 두고 전능하신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묵주를 잡고 드리는 기도의 위력을 세상 사람들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무능하고 어리석은 이들로 비춰질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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